|
계간 시인세계 | | |
|
|
남쪽에 ‘한국문학’이 있듯, 북쪽에는 ‘조선문학’이 있다. 한 민족에게 성향이 상이하고 쉽게 합치되지 않는 두 가지 문학이 공존한다는 것은, 진정한 민족문학이 태어나기까지 매우 힘겹고도 어려운 산고의 시간이 필요함을 예견케 한다. 이것은 통일만 된다고 쉽게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시인세계'는 이번호 기획특집으로 “오늘의 조선시와 조선 시인들”을 조명해 보았다. 민족문학으로의 대통합이라는 전제하에 갖게 되는 북쪽의 시와 시인들에 대한 관심은 그 성과를 위한 중대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시편 동기춘 | 고와야 한다·보증 렴형미 | 여인의 노래·나는 철의 도시 행복한 녀인이예요 리영삼 | 기다리는 땅·누가 말하랴 리진협 | 포전길·새 세기 앞에서 박해출 | 아버지의 고향은 눈앞에 있는데·현종암 너처럼 신흥국 | 6월의 금강속사 최영화 | 이깔나무 봇나무 홍철진 | 군사분계선 표말뚝과…·우리는 이사를 간다
▶평론 민족과 영웅의 서사 | 이상숙 최근 북한시의 양상과 미적 가능성 | 홍용희 최근 조선 시문학의 한 단면 | 김학렬 시에는 새것이 있어야 한다 | 류만
<시편>
고와야 한다 외 1편 동 기 춘
밭김을 매던 로동의 첫날 내가 마구 찍은 엉성한 이랑을 돌아보며 아버지는 조용히 말했네 ― 김 맨 뒤가 고와야 한다
그제사 아버지가 앞서 나간 이랑을 보았네 얼마나 고우랴 제방같이 미끈한 이랑 나는 들었네 악보 같은 이랑에서 곡식포기 춤추며 웃는 소리를
늦여름 새초 베러 갔던 어느날 나는 덤벼 치며 무더기만 찾았네 묶어 놓은 단도 엉치가 내밀려 세울 수 없었네 아버지가 보다 못해 말했네 ― 깐깐히 베여 곱게 묶어라
나는 아버지가 일한 곳을 보았네 빡빡 곱게 깎아 내는 풀판 어렵지 않게 단을 채우는 그 솜씨 묶어 세운 풀단들은 맵시쟁이 처녀들 같았네
그해 가을 벼가을할 때였네 나는 정신없이 낫을 휘둘렀네 빨리 벨 생각에 맡은 이랑만 쫓으며 벼줌을 아무렇게나 뒤에 던질 때 아버지의 핀잔이 들려왔네 ― 단을 곱게 지어라 그래야 묶을 때 쉽다
옆에서 아버지가 베여 나간 자리를 허리 펴고 땀 씻으며 보았네 아, 세상 고운 일매진 단의 행렬 논판은 누런 수확을 금빛 주단으로 편 듯
겨울날 땔감하러 산에 갔을 때도 발구에 볼품없이 처실은 나뭇단을 아버지는 다시 헐어 쌓으며 말했네 ― 곱게 실어야 꿰여지지 않는다
나는 말없이 일손 거들며 보았네 아버지가 쌓고 바줄로 조이는 모습을 날씬하게 동여진 나무바리는 아무리 험한 돌두렁길이라도 새처럼 날아 내릴 수 있었네
모든 완성은 아름다와야 한다 촌늙은이가 로동으로 가르쳐 준 예술철학 묵묵히 그 진리 배우던 날에는 그것이 한생 창조의 기틀로 될 줄 알았던가 지금도 나의 창조 하나하나에는 놓여라, 그 밭이랑이, 풀단이, 짐발구가…… -'조선문학' 2003. 5. 보 증
우리 마을 세포위원장네 집에서 열렸다 엄숙히 나의 입당을 심의하는 총회가
거기엔 앉아 있었다 46년도 당원들인 나의 아버지며 이웃집 로인, 동네어른들이 50년 전선병사 세포위원장이 개회를 선언하고 보고를 하였다
나를 키운 사람들이 나를 두고 묻고 토론하고 보증하는 회의 보고도 길지 않았고 회의도 길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뉘집 아무개가 아니라 나를 동무라고 부르며 엄격히 절차를 밟아 나의 입당청원서를 귀 기울여 들었고 5년 세월의 자욱을 검토하였다
나는 그들이 애젊은 내 앞에서 조선로동당이라는 성스러운 이름을 얼마나 경건히 부르는가를 보았다
아버지와 어깨를 나란히 한 당세포 나의 경력이자 그들 경력의 한토막인 살아 있는 중견자들과 숨결을 함께 하는 당세포
위대한 당의 위임으로 전권을 행사하며 쳐들리는 손들을 나는 보았다 반들반들 고운 손톱은 하나도 없는 손 더러는 헝겊으로 동여맨 손가락 하나같이 흙물이 배여 검은 줄이 간 손금들
욕됨이 있으랴 저 손에 믿어다오 내 인생을 고향아 결심이 돌처럼 떨어지여 심장바닥에서 피솟음이 일었다
이것은 감상적인 추억이 아니다 나는 고향의 보증으로 그렇다 쉽지 않은 고향의 보증으로 새 생명의 축복을 받았다 그날은 1962년 4월 28일이였다 -'조선문학' 2003. 5.
동기춘 함경북도 평천군 어간리에서 출생. 1966년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시분과 부원으로 일하다가 1969년부터 현재까지 작가동맹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녀인의 노래 외 1편 렴 형 미
아름다운 행복의 옷은 녀인이 뜬다네 기쁨과 때로 아픔이 엉킨 생활의 실토리 녀인의 작은 두 손에 풀려 나가네 인생은 다시 뜰 수 없는 뜨개질과 같아 만약 한 코를 놓친다면 불행의 흠집은 날로 커지리
아, 녀인이여 불 같은 사랑으로 마지막 한 코까지 뜨고 또 뜨라 정다운 이들에게 입혀 줄 아름다운 행복의 옷은 성실한 녀인만이 지을 수 있다네
아기를 업은 엄마 넘어질 수 없듯이 사회주의 어머니는 꿋꿋이 걸어가리 애끓는 눈빛으로 요람을 다독이고 창조의 두 손으로 생활의 뿌리 가꾸는 강직한 이 나라 여인들 있어 부강의 조국은 일떠서리라
아, 녀인이여 사랑의 시작도 사랑의 마무리도 그대가 맺는 법 정다운 이들에게 입혀 줄 아름다운 행복의 옷은 굳세인 녀인만이 지을 수 있다네 -'조선문학' 2002. 3. 나는 철의 도시 행복한 녀인이예요
저 애가 바로 눈매 부리부리한 얼굴에 검댕이 칠한 저 사내애가 바로 내 아들이예요
불의 고장에 태어나선지 그저 불장난밖에 몰라요 놀음도 밤낮 쇠물…… 용해공 놀음
밤 늦도록 들어오지 않는 장난꾸러기 어둠 속에 찾아내어 듬쑥 안고 올 때면 아, 나는 왜 그리도 행복스러울가요
이 나라 사나이들 중에서도 제일 억세고 뜨겁고 강의한 철의 도시 대장부를 내 낳아선가요 조국의 전초병, 개척자, 밑뿌리 그 위대한 부름에 대답할 하나의 용사를 내 품에서 떠올려선가요
아아, 사품치며 끓는 심장의 쇠물로 강성대국의 굳건한 강철기둥을 부어가는 나는 엄마― 철의 도시 행복한 녀인이예요! -'조선문학' 2000. 11.
렴형미 '엄마의 노래'로 1997년 '전국군중문학현상응모' 1등 당선.
기다리는 땅 외 1편 리 영 삼
지척이어도 늘 마음 검게 천리 먼 분계선 땅 세월 속에 인가마저 묻혀 버린 곳
시내가 빨래터는 갈숲에 자취 없고 소나무 그루터기에 재빛 다람이 둥지를 틀었구나 황량한 들 우에 모기떼 소란하고 짝 잃은 기러기 북녘을 향해 깃을 친다
장장 50여 년 어이 그립지 않았으랴 저물녘 집집의 화로에 피던 쑥연기 주고 받던 제 고장 사투리가
해 저문 이 저녁 너를 두고 떠난 이들 어디선들 그 어디선들 발편잠을 자랴 -'조선문학' 2001. 11. 누가 말하랴
무슨 죄 들어 두세 겹 철조망이 살을 파먹고 피를 마시느냐
사품치는 강물 우에 부러진 교각이 신음하고 부산으로 이어진 길목에 허리 꺾인 백양나무잎새 떨고 있구나
북으로 남으로 내왕이 자유롭던 날 농부와 길손들이 이야기꽃을 피웠던 그늘자리는 한낮의 뙤약볕에 벌거벗었다
산천초목이 분노에 떠니 조국아 너 겪는 수난 말할 것 없구나 분렬된 너를 후대 앞에 남기고서야 그 누가 말하랴
우리 시대에 심장을 가진 사내들이 살았다고 -'조선문학' 2001. 11.
리영삼 '기다리는 땅'으로 2001년 '조선문학' 축전상 수상.
포전길 외 1편 리 진 협
처녀총각 그때처럼 웃으며 안해와 나란히 걷는 포전길입니다 서로 보기만 해도 수집음 타던 그때의 그 모습은 세월이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하지만 못다한 일을 놓고 부끄럼 타는 그것만은 몸에서 씻지 못한 부부입니다 그럴 때면 나란히 서도 불편을 느끼고 실련을 당한 듯 마주 보지도 못한답니다
헐치 않습니다 함께 웃으며 나란히 이렇게 포전길 걷는다는 것은 한포기 감자 밑에도 우리 땀이 깃들고 한 줌 벼알도 총알처럼 무거워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웃으며 함께 걷는 포전길 믿으십시오! 우리 부부가 흘린 그 땀을! 벌에 살면서 가을 앞에 부끄러우면 우린 오래오래 마주 보지도 못한답니다 -'조선문학' 2002. 6.
새 세기 앞에서
끓는 피 흐르는 한가슴을 젖히고 뜨겁게 품어 안던 첫사랑은 아니냐 한껏 타는 열정과 사랑으로 인연을 맺노라 젊음이 약동하는 두 손을 뻗치여 그대의 벅찬 날과 달들을 받아 안노라
네 품에 탯줄을 끊은 아기인양 네 품에 시작하는 맥박도 새롭다 처녀지의 대지 우에 첫 자욱 내짚게 되는가 21세기여 우리를 맞으라 푸른 들, 푸른 하늘, 한 점 풀잎에도 티 없는 마음을 안고 온 그대의 주인들을
네 앞에선 이 손에서 넓은 들은 들 그 한끝까지 알알이 이삭만을 영글이게 하리라 번듯하게 활개 펴는 기계화 새 포전에 그대의 사계절은 풍요해 설눈처럼 즐거울 온실의 푸르름과 걸음 바쁜 우유차의 봄언덕 초여름의 한창 감자철을 안고 가을 로적가리 밑에 어깨 둥실히 그대의 농악소리는 흥겨우리
공장마다 울리는 기대들의 동음은 하늘을 날으는 천리마의 발굽소리 바다랴 호수랴 어디서나 퍼내리 풍어의 기쁨 맑은 물은 타빈을 돌려 구을며 섯돌고 비단필에 싸안긴 처녀들의 웃음소리 길과 금잔디, 공원과 유원지를 덮으리 병원과 료양소, 휴양지의 백사장은 날마다 이 땅에 100돐상을 부르고 더 넓어진 솔문의 교정과 궁전들은 꽃리봉 우에도 박사의 월계관을 얹어주리
1억이면 어떠냐 2억이면 어떠랴 만발한 인생의 숲은 무성하도록 녀인들은 더 많은 생을 그대의 산천에 드리라 백두에서 한나까지 통일된 강토 우에 아이들은 뛰놀고 백학은 감돌아 집집의 창문은 창문마다 금수삼천리 비껴 담은 거울이 되리니 우리의 새 세기는 삶의 무한대
아, 또 한돌기 100년 나이를 시작하는 세기여 100년이 하루같이 그런 날들만 차 넘치기를 다만 이 땅에 허리 끊긴 강토의 아픔과 폭음에 무너지는 거리, 타다 남은 가로수 더운 피 흐르는 땅이 없기를
바라노라! 영원토록 화목한 평화의 비둘기가 그대의 기슭에서부터 나래 젓기를 지금도 노예의 세기에서 방황하는 황폐화된 대지들에서 너의 수려한 날과 날들이 어지럽혀지지 않기를. -'청년문학' 2000. 7호.
리진협 '새 세기 앞에서'로 2001년 '전국군중문학현상응모' 1등 당선. 함경남도 북청군 협동농장의 농장원이면서 시창작을 겸하는 30대의 신진농민시인. 아버지의 고향은 눈앞에 있는데 외 1편 박 해 출
노를 저어 해금강문을 나서니 가슴 뭉클 젖어 와라 어린 시절 아버지 무릎에서 듣던 이야기 솔섬을 에돌아 배바위를 지나 거기서 옥교암을 돌아서며는 고향마을 감포가 보인다는……
감포, 그 이름 가슴에 다시 새겨 보니 어렸을 땐 그리움 속에 가고 싶던 곳 부르고 부르면 화답할 것만 같은 아버지의 고향 손 뻗치면 닿을 듯한 지척이건만 해종일 바다 위에서 나는 맴돈다 미국놈 군함은 언제까지 저 뱃길을 막아서려는가
지척도 천리란 그 말 이 가슴 허빈다 한지붕 아래 피를 나눈 형제면서도 아직까지 남남처럼 서로 모르는 그 눈물 속의 모질음이 우리 소원 아니어서 통일을 부르며 불같이 살아왔건만 어찌하여 반세기 넘는 분렬을 안고 세기를 넘었느냐
언제까지 내 아들에게 저기는 할아버지 고향 감포라고 그곳의 대추나무집은 할아버지 집이였다고 옛말처럼 들려줘야 하느냐 옛말이 아니면서도 옛말처럼 들을 아이들을 생각하면 이 땅은 남남이 될가봐 꿈속에서도 아버지의 고향땅을 밟아 본다
꿈에서만 가는 길이더냐 물도 한빛, 물길도 한길이건만 땅우에 독버섯마냥 솟은 저 콩크리트 장벽 물우에도 솟아 있는 듯 눈에 보인다 네것이요 내것이요 바다도 두 개로 갈라놓은
아 하루 또 하루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갈수록 깊이깊이 새겨지는 아버지의 고향마을 포구여 산처럼 쌓인 그리움의 닻을 내릴 그 길은 틀어 쥔 노대를 폭탄처럼 움켜쥐고 있어서는 안될 분렬의 장벽 산산이 까부시며 가야 할 통일의 길 - '조선문학' 2002. 8.
현종암 너처럼
신선들이 종 울리며 즐겼다는 현종암 절경 속의 신선들은 어디로 갔느냐 그 옛날 타종봉은 어디 있느냐 나는 밤새도록 종 울리며 해돋이 보고 싶건만 내 지금 북남을 가로막은 장벽 앞에 서 있다
삼천리 방방곡곡 울려 갔을 종소리 나는 분렬의 고통 안고 몸부림치는 세대 나는 통일의 그리움에 목이 타는 세대 기필코 하나의 조국을 이룩할 세대
그 옛날 타종봉을 나에게 다오 -'조선문학' 2002. 8.
6월의 금강속사 -금강산에서 열린 6.15 북남공동선언 발표 1돐 기념 민족통일 대토론회장에서 신 흥 국
언제면 깰가
연회장이다 말이 같아 통역도 필요 없어 자, 다 같이 축배! 풍습 같아 설명도 필요 없어 이렇게 쫏는 거야 축배!
챙!― 유리잔들 합쳐지며 내는 소리 갈라진 땅의 세월 부둥켜 안는 소린가 단번에 기울인 이름 높은 평양술에 저봐라, 서울사람 불덩이 안았단다
노래 없이 이 날을 보낼손가 '조선은 하나다' 합창 사진 없이 이 자리 있을손가 손 잡고 어깨 겯고 한 모습 찰칵
어허, 취하네 취하네 세계의 명산 금강산에서 기묘한 바위에 눈이 취하고 옥계수 물소리에 귀가 취하고 향긋한 숲향기에 코가 취한다지만
우린 흠뻑 취하네 도수 높은 통일 열기에 술 취한 건 시간 가면 깬다 하지만 우리 맘 언제 가도 깰 것 같지 않네 아, 깨면 안돼!
한마음
너무도 깨끗해 함께 만져 보았지 계곡 따라 널려 있는 하얀 돌들 쓸고 다듬어 놓아 둔 백옥인듯 너무도 맑아 함께 잠그어 보았지 소에 담긴 옥계수 맑은 물 그냥 거짓말 같아 하지만 아서라, 손 잠가 보니 정말 물인 것을
등산이 끝났을 때 함께 다닌 그 친구 남쪽의 벗 담배를 꺼내며 하는 말 ―옷먼지 한점 떨어질가 조심스러웠고 한점 공기 흐려 놀가 담배를 못 피웠어요 서울 가면 이것을 글로 쓸 거예요 이러히도 아름답게 금강을 지켜주신 고마운 분들의 이야기
나는 손을 덥석 잡았네 누구나 꼭 같은 한마음 평양 가면 나도 쓸 거요 확! 불달아, 불이 달려 빨갛게 타드는 우린 한마음 서로 나누어 피우네 그대 주머니에도 내 주머니에도 꼭같이 있는 멋 있어, 담배 이름도 '한마음' -'조선문학' 2001. 10.
이깔나무 봇나무 최 영 화
백두산에서 태여나 백두밀림에서 자라 정이 깊어진 두 나무 이깔나무 봇나무
성산의 땅이 좋아 밀림의 물이 좋아 이깔나무 몸매 미끈한 미남 되였네 봇나무 몸매 아름다운 미녀 되였네
한쌍의 이 미남미녀 키워준 은혜 하도 고마워 그 미를 백두땅 삼지연 새 거리 풍치에 바치었네
이깔나무는 별장 같은 새 주택 정원수가 되여 봇나무는 넓게 열린 새 거리 가로수가 되여
함께 한껏 설레이는 두 나무 이깔나무의 그 청신한 미와 봇나무의 그 순결한 미는 한쌍의 사랑의 미모라네 -'조선문학' 2003. 2.
최영화 1926년 강원도 화천군 출생. 1962년부터 작가동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문예총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1995년 퇴직 후 작가동맹 작가로 활동. 시집 '당의 숨결' '날개' '크나큰 사랑'이 있으며 서사시 '김성진 영웅', 장시 '내 사는 집', 가사 '내가 사는 나라' 등 많은 작품들이 있다. 김일성상(1982) 계관인.
군사분계선 표말뚝과 하고 싶은 말 외 1편 홍 철 진
내 어린 시절 그림공부 시간에 크레용으로만 그려 본 군사분계선 표말뚝아
너를 그리자고 까만 크레용이 필요한 줄 알았던 어린 마음이 자라 오늘은 이렇게 총 잡은 병사되여 네 앞에 서 있다
나는 기어이 너와 말을 나누고 싶은 세대 모르지 않는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들이 너와 부딪쳐 울분의 메아리로 되돌아섰는지
너와 말을 나누자고 백두에서 판문점까지 부르기조차 뜨거운 피 같은 언어들이 얼마나 굽이쳐 흘러왔는가
목이 쉬도록 웨쳐도 보았고 민요풍의 노래로 찾아도 보았건만 진정 너와 나눌 말 우리말 사전에는 더는 없었구나
말, 태고적부터 입으로만 해오던 말 그러나 너와는 입으로는 나눌 수 없게 된 말 이 세상 모든 말을 다 삼켜버렸으니 내 어찌 가슴에서 말마디를 고르랴
그래도 나는 기어이 너와 말을 나누어야 할 세대 똑똑히 보라 군사분계선 표말뚝아 분렬을 끝장낼 멸적의 총구가 지금 네 앞에 있다 이 총대의 메아리만이 너와 나눌 병사 나의 말이다 - '조선문학 ' 1999. 6. 우리는 이사를 간다
이사짐을 싣고 가는 자동차를 바래워 따라 서며 흔들던 낯 익은 손들도 이제는 고개길에 가리워지고
끝까지 바래울듯 지꿎게 따라 서던 시냇물도 지친듯 갈래를 바꾼 굽이굽이 길을 따라 우리는 지금 이사를 간다
얼마나 먼길을 이렇게 떠나군 했던가 동해에서 서해로 서해에서 중부로 이웃집마냥 넘나든 그 지경들을 작은 손으로야 어찌 다 꼽으랴
그 길에서 낯설었던 학교는 얼마였으며 우리의 이사짐 따라서지 못했던 사연 많은 편지들은 그 얼마랴
옛말처럼 쌓여진 가지가지 이야기 아버지의 군복 단추로 꼭 채워둔 채 우리 살아도 그날에는, 마지막 이사짐 내려놓는 그날에는 그 단추 풀어 헤치고 마음껏 자랑하리라 별처럼 빛나는 날과 달들을
그래선가 새집의 기와를 얹으며 벙글써 웃고 있는 꿈 많은 신혼부부일지 모를 저 사람들에게도 구면인듯 손 흔들어 주고 싶구나 우리를 믿고 마음껏 행복을 설계하시라 그 어떤 포성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행복의 주소, 그대들의 보금자리를
우리를 믿고 이 시각 공원의 분수는 더 높이 오르고 산원의 구급차는 더 빨리 달리리 그 행복의 웃음 아래 고여질 우리의 이사짐 생각만 해도 가슴 부풀어 자동차여 빨리, 더 빨리…… -'청년문학' 2002. 5.
홍철진 1998년 '움직이는 땅'으로 등단. '전국군중문학현상응모' 1등 당선. <시론>
민족과 영웅의 서사 -전형화된 북한시론과 시 : 해방 후부터 1999년까지 이 상 숙 | 문학평론가
1. 군대국가, 투쟁의 문학
와다 하루끼('북조선', 돌베개, 2002)는 북한의 역사란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의 이행과정’이라고 하였다. 북한 역사의 대부분을 통치한 김일성은 항일유격대 사령관으로 귀국하여 해방 정국의 북한에서 정치적 선편을 잡았으며, 후계자 김정일은 ‘군 최고사령관’, ‘장군’으로 불린다. 인구 대비 정규군 비율이 세계최고이며, 국내 총생산의 30%를 국방비에 배정하는 북한이 군대국가라는 데에 이견은 없다.
북한 문학에서 항일抗日, 대미對美 전투의 경험과 교훈은 중요한 주제와 소재이다. 해방 후의 항일혁명문학, 전쟁기의 전쟁 문학, 주체시대의 수령형상문학, 최근의 선군先軍문학에 이르기까지 타민족과의 전투, 민족과 혁명을 위한 투쟁의 형상화는 북한문학의 주요과제였다. 국가의 정치적·사회적 과제가 그대로 문학적 과제가 되고, 국가의 체제가 문학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나라. 이것이 북한문학이며 북한이다. 시대와 인간에 대한 고뇌를 고유한 작가 정신과 사유로 담아내는 예술로서의 문학의 본령과는 거리가 먼, 정치와 혁명의 수단으로만 존재하는 북한문학을 인류보편의 예술 범주 밖의 것으로 치부하는 견해도 무리가 아니다.
북한문학 작품은 대부분 정책 선전을 위해 창작되고 유포되기 때문에 정치적 상황에 따라 생명력을 상실하기도 하고 부활하기도 한다. 정치상황이 문학작품의 시효를 결정하는 절대적 조건인 것이다. 따라서 문학작품들은 문학사적 전통과 맥락을 형성하지 못하고 정치적 사안별로 존재한다. 마치 정치 환경에 따라 정책이 수립되고 폐기되듯이, 전쟁과 주체선언이라는 두 개의 분수령 이쪽과 저쪽의 시들은 서로 교통하거나 서로를 반영하지 못한다. 북한 문학의 전통이라는 혁명전통의 하위개념이며, 문학유산이란 대중교양 수단의 집적일 뿐이다. 또,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 또한 격절되고 파편화되어 있다. 동일한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가라도 시대마다 새로 씌어지는 문학사의 편찬의도와 정치적 지향에 따라 극단을 오간다. 북한사회의 정치적 선택에 따라 고전작가와 고전작품에 대한 호불호의 평가가 확연히 달라지고, 월북작가들에 대한 평가 또한 몇 번씩 뒤집어진다. 납북시인 정지용의 경우, 1950년대에서 주체시대까지 수십 년 동안 “기교에만 치우친 부르주아 반동작가”라 매도되어 문학사 서술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김정일 시대에는 민족정기를 드높인 애국시인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김소월은 1950년대에는 인민성과 애국성, 행동성, 민족성을 갖추어 “인민의 해방투쟁에”기여했다고 고평하다가 주체시대 수십 년 동안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 90년대 중반에는 다시 “민족 감성과 생활정서, 전통 율조를 탁월하게 구현한 시인”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과정에 여러 복잡한 정치 사회적 배경이 있을 것이지만, 그 근본 원인은, 독립적인 예술성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종속된 북한문학의 문학의 위상에 있다.
북한문학 창작방법론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이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문학예술, 사회주의 문학예술의 창작방법으로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노동계급성, 당성, 인민성을 구현하는 “현대의 유일하게 옳은 창작방법”('문학예술사전', 1991)으로 인정된다. 노동계급의 혁명적 의지, 근로인민대중의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이 당과 수령의 지휘 아래 완수되는 장면을 그려내어, 대중 선전과 교화를 담당하는 것이 사회주의 문학의 임무이며 존재 방식인 것이다. 때문에 개인적인 감정의 유로流露나 정화라는 순수문학론은 불필요한 부르주아적인 사치로 치부된다. 레닌이 말했듯이 ‘교육이 독재자의 무기이듯’ 대중교육의 선봉에 선 문학은 독재자의 매우 효과적인 무기인 것이다.
2. 역사 재구성과 서정적 주인공
사상의 자유 없이 경직된 체제 선전의 문학으로서 북한의 시와 시론은 북한 정치사의 각론을 담당한다. 북한 정치의 시대 구분에 따라 그 이념과 정책을 반영하는 작품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북한시사는 충실한 것일 수 있다.
해방 후 북한문학에서 강조한 것은 항일혁명전통과 카프의 계승이었다. 김일성은 권력 쟁탈을 위해 항일유격대의 경력을 십분 활용하였고, 문학도 항일혁명의 역사를 그려내는데 바쳐졌다.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실제 카프 문학의 전통보다는 항일혁명전통이 강조되었다. 국가수립의 정통성을, 일본이라는 타민족과의 전투였던 항일혁명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후 항일혁명의 역사를 발굴하고 기록하는 ‘역사 재구(再構, reconstruction)’로서의 문학의 역할은, ‘불멸의 력사 총서’, ‘4·15 창작단’ 등의 국책 문예사업을 통해 꾸준히 확장되고 심화된다. 정권 장악과 유지를 위해 역사는 선택적으로 발굴되고 기록되었으며 조작되고 인용되었다. 시와 소설로 기록된 민족의 역사에는 주인공이 있어야 하고 그 주인공은 영웅적이어야 했다. 문학이란 민족의 영웅을 복원하고 전파하는 유용한 도구였다. 주체 이전까지는 민족의 영웅에 유격대장 김일성뿐 아니라 무명의 유격대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민족과 영웅의 서사로서의 역사, 그 역사를 충실히 재구하는 문학. 북한문학은 이러한 단순한 구도로 재편된다.
해방 정국에서는 항일抗日 민족의식이 활용되었고, 전쟁기에는 반미反美 의식을 민족적 단결과 증오에 활용하였다. 우리 민족에 대한 맹목적인 호감은 미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발현되었고, 적개심과 증오는 전투의지 고취에 활용되었다. 전쟁기의 반미 투쟁의 경험은 전후 건설기의 복구와 재건의 의지로 전환되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대의’에는 늘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민족의 해방’과 ‘반제국주의 투쟁’이 자리하고 있다. 사회주의 진영의 민족주의 구도를 북한식으로 변형한 ‘자주와 주체’ 또한 맹목적 민족주의의 맥락 위에 있다. 또, 우리식 사회주의나 우리민족제일주의, 민족적 특성론 등도 민족 의식을 강조한 전략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타민족과의 대결구도를 강조하는 폐쇄적인 사회와 전제적 정권 유지에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남한과의 대결구도도 민족해방이라는 대의를 앞세우는 것이며 사회주의 혁명 또한 반민족적인 제국주의와의 대결 구도 안에서 강력한 당위성을 가진다.
항일투쟁기의 무장투쟁 영웅과 전쟁기의 전쟁 영웅은 물론, 전후 복구기의 천리마 영웅, 1980년대의 숨은 영웅 등 영웅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의 책무는 시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민족 역사의 주역으로서 영웅 형상의 창조가 북한문학의 존재 방식인 것이다. 북한문학 전반을 조망할 수 있는 유력한 비평담론인 ‘민족적 특성론’에서도 문체, 율격, 어조 등의 문학적 형식보다는 ‘민족적 성격’이 강조된다. 민족의 투쟁사를 그려내는 문학에서 긴요한 것은, 문학적 자질과 성과가 아니라 영웅의 고귀한 품성에 대한 수사修辭였다. 서정시에서도 시적 자아는 서정적 자아가 아니라 ‘영웅적 품성을 가진’ “서정적 주인공”이어야 했다. 시문학이 역사의 재구와 주인공의 영웅성 부각을 목표로 할 때 서사성 강화는 필연적인 현상일 것이다. 서사성의 강화는 다양한 생활감정이 표출되고 자연스레 개인 서정이 드러나는 최근의 북한 시에서도 견제와 균형이 요구되는 북한시의 대표적 성향이다. (김재용, '분단구조와 북한문학', 2000, 소명출판)
민족 영웅을 그리는 영웅서사로서의 시문학은 유일 주체, 유일 영웅 시대인 주체 시대에 들어서서 정론성과 찬양성이 노골화된다. 북한은 195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 진영에서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하여 “우리식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폐쇄적인 독자성과 자주성을 공고화하였다. 북한 역사 초기부터 이른바 주체 시대까지 북한은 늘 ‘민족 자주’, ‘민족 주체’를 강조한다. 정권 수립과 유지, 그리고 안전한 이양을 위해 ‘민족’과 ‘주체’는 매우 유용했다. 혁명의 주체로서 ‘인민’ 즉 ‘사회주의적 인간형’이 강조되었으나, ‘인민’은 진정한 주체일 수 없었다. 수령과 인민의 관계는 봉건적 가부장제처럼 어버이와 자식들간의 육친적 사랑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민에게 ‘주체’란 수령의 교시에 교조적·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객체’의 허울일 뿐이었다. ‘민족’과 ‘주체’의 논리를 정치적 객체로 귀결시키고, 전제군주와도 같은 통치논리를 육친적 사랑으로 치환하는 김일성의 집권전략은 문예정책에서는 유일한 영웅 ‘수령의 형상’을 창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모든 것을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고 사람을 위하여 복무하게 하는 것이”('김일성 저작선집') 주체사상의 요점이고, “육체적 생명보다 정치적 생명을 더 귀중히 여기는 자주적 인간을 중심에 놓고 그리며 자주적인 인간에 관한 문제, 인간의 자주성을 옹호하는 문제에 예술적으로 해답을 줌으로써 생활과 투쟁의 교과서”라는 선언으로 주체문예이론은 시작된다. 하지만 ‘자주적 인간’은 수령이라는 ‘유일한 영웅’으로 제한되었고, 민족의 역사는 수령의 영웅화에 바쳐졌다.
오늘은 세기의 가장 높은 상상봉에서 구름을 뚫고 멀리 안개를 가르시며 위대한 주체사상으로 인류가 걸어갈 앞길을 휘황히 밝히시고 세계의 흐름을 하나의 거창한 대하로 인류의 청춘 공산주의에로 인도하시나니 아,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 이 위대한 사상이 제국주의 마지막 생명선을 끊어버리며 혁명의 폭풍으로 온 지구를 휩쓸며 세계를 움직여 나가는 이 시대를 력사는 영원히 영원히 주체시대라고 노래할 것입니다. -정서촌, '어버이수령님께 드리는 헌시' (1974) 부분
수령에 대한 찬양의 구호로 채워진 이 시는 주체 시대 시문학의 전형이다. “가장 높은 상상봉에”, “구름을 뚫고 멀리 안개를 가르는”, “위대한”, “휘황히”, “거창한 대하” 등은 오로지 하나의 영웅을 위한 헌사이다. “제국주의 마지막 생명선을 끊는”, “혁명의 폭풍으로”, “세계를 움직여 나가는” 등으로 김일성의 반제국주의, 사회주의 투쟁의식은 찬양된다. 그러나 거창한 헌사로 찬양된 김일성과 그의 시대를 기릴 주체는 ‘인민’이 아니라 “력사”이다. 그 역사 또한 영웅을 위해 재구성된 역사일 것이라는데 북한시문학의 한계와 모순이 있다. 이 시를 통해, 민족과 영웅의 혁명과 투쟁은 역사에 수렴될 때 가장 영예롭다는 북한식 역사 재구성의 열망을 확인할 수 있다. 찬양과 구호 일색의 앙상한 정치시가 주체시대 시문학의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북한 시문학의 전부는 아니다. 주지하듯, 사회주의 몰락 이후 국제사회의 변화, 유훈 통치기를 지나 김정일 체제로 확립된 북한의 선택, 급변하는 남북관계 등의 훈풍이 문학에도 전해지고 있다.
3. 북한 시의 희망, 민족문학의 희망
여전히 수령과 주체의 그림자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북한 사회는 변화하고 있다. 유훈 통치에 이어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에 취임한 후, 남북대화, 7·1조치, 서방외교 등의 전향적인 변화가 있었고 문화예술계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문학의 경우 시, 소설의 주제와 소재에 가족이나 연애 등의 개인의 정서,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부부갈등 등의 생활이야기가 등장하고, 통일문제나 이산문제를 다루는 시각도 매우 유연해졌으며, 서정시의 창작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러한 북한문학의 변화는 우리 민족문학의 변화라 할 수 있다. 북한문학 또한 민족 문학의 일부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문학의 변화에 주목하는 것은 민족어의 변화에 주목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민족문학의 학문적 범주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북한문학과 남한문학은 ‘민족어’를 공유하고 있으며, 그것이 “상상”뿐일지라도 ‘민족’이라는 동질성을 자각하고 있으며, 반세기의 분단이 민족 역사의 일시적 상황임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 영웅의 역사가 수령형상으로 수렴되던 북한식의 전형화된 시론과 시가 새로운 민족 정체와 역사의 주체를 탐색하기를 기대해본다. 이는 비단 북한문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상숙 1969년 서울 출생. 199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2004년 고려대학교 박사 졸업. 논문 '북한문학의 민족적 특성론 연구' 외 다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