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몽(相思夢)~~💌
-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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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과 세종은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깊었어요.
세종이 양녕대군과 평양 기생인 정향(丁香)을 맺어준 사랑이야기 이제 타임 머신을 타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볼까요?
양녕은 꿈속을 헤매다 까치 울음소리에 잠을 깼어요.
께께 껙껙께…?”
‘오늘은 대궐에서 희소식이 오려나?’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요.
그때였지요.
“나으리, 그동안 무고하셨는지요?”
대궐에서 나온 내시가 달려와 허리를 굽혔지요.
“자넨 김내관이 아닌가?”
그래, 아침부터 어인 일인가..?”
“전하께오서 급히 입궐하라시는 명이 계셨사옵니다.”
“대체 무슨 일이라 하던가?”
“가보시면 아시게 되실 테지요?”
“알겠네. 잠시 기다리시게.”
양녕은 교군들을 재촉해 부리나케 입궐했지요.
“전하, 찾아계시옵니까?”
“어서 오세요, 형님. 그동안 무고하셨는지요?”
세종이 반갑게 맞이했지요.
“소신이야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하온데, 무슨 연고로 신을 찾으셨는지요?”
“급하기도 하십니다. 어서 좌정부터 하시지요.
형님, 그동안 자주 뵙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전하, 당치 않사옵니다. 그동안 자주 찾아뵙지 못한 이 형을 용서하여주시오소서.”
“그렇지 않습니다, 형님께서 보위(寶位)를 이으셔야 되는데 동생인 제가 보위를 이어받아 늘 죄송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전하, 듣자옵기 민망하옵니다.”
양녕은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몰라 했지요.
“형님, 전에 관서(關西 : 평안도) 지방을 한번 유람했으면 하셨지요?”
“그렀사옵니다만...?”
양녕은 느닷없는 유람이야기에 조바심이 생겼지요.
“이번 기회에 한번 다녀오시지요?”
“그럼 윤허해주신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저와 한 가지 약조를 해주셔야겠습니다.”
“하교해주시오소서.”
“형님께서도 평양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계실테지요?”
“그야 이 나라 제일의 색향(色鄕)이 아니옵니까?”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평양을 여행하는 많은 이들이 기생에게 빠져 노자를 털린다고 들었습니다. 하여, 이번 여정에서 절대 기방(妓房) 출입을 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주시겠습니까? 물론 어려운 일인 줄은 압니다.”
이 나라 제일의 풍류객으로 기생을 멀리하라는 말은 고통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임금의 하명(下命)을 거역할 수도 없었지요.
“전하, 그리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고맙습니다, 형님.
그럼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양녕은 이튿날이 되자 평양을 향해 출발했지요.
양녕대군이 지나가는 고을마다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예쁜 기생을 시켜 모시게 했지만 그때마다 양녕은 기생을 멀리했지요.
이윽고 평양에 도착했는데
봄이 한창 무르익은 춘삼월이었어요.
유유히 흘러가는 대동강과 절벽 위의 부벽루(浮碧樓), 그리고 능라도(綾羅島)의 수양버들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했어요.
세종의 밀지(密旨)를 받은 평안감사가 나루터까지 마중을 나왔지요.
“나으리, 오시느라 노고가 크셨습니다.”
“이렇게 사또께서 친히 맞아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별 말씀을요. 지금 부벽루에 환영연 준비를 했사오니, 어서 오르시지요.”
“공무로 온 것도 아닌데……. 관폐를 끼치는 것이 아닐런지…….”
“관폐라니, 당치 않사옵니다. 저희 고을에 들려주신 것만으로도 큰 광영이옵니다.”
“고맙소, 사또.”
이윽고 부벽루에 도착해 보니 진수성찬을 차린 주안상과 평양 제일의 기녀들이 미모를 뽐내는 듯 늘어서 있었지요.
“나으리,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고맙소이다. 과연 소문대로 평양은 풍광이 수려할 뿐 아니라, 미인 또한 많구려.”
“여봐라! 오늘 이 자리는 주상 전하의 형님이신 양녕대군 나으리를 환영하는 자리이니라. 어서 풍악을 울리고 술을 따라 올리도록 하여라.”
“예, 사또!
나으리, 술 한 잔 받으시오소서.”
옆에 앉은 기생의 말에 양녕대군이 잔을 내밀었어요.
“그럼 어디 한 잔 따라 보거라.”
술을 따르는 기생을 쳐다보니 한양에서 놀던 여자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예뻤지요.
“술맛이 참 좋구나. 이 술 이름이 무엇이냐?”
“이곳 평양에서 나는 감홍주(甘紅酒)이옵니다.”
“감홍주라……. 자 너도 한 잔 받거라. 술이란 주고받아야 맛이 나는 법이니..”
“고맙사옵니다, 나으리.”
주연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양녕이 사또를 불렀어요.
“사또!”
이제 그만 연회를 파했으면 하오.
오늘은 피곤해서 객사로 가서 편히 쉬고 싶소이다.”
“먼 길 오시어 피로하실 테지요. 그럼 연회는 마치도록 하겠사옵니다.”
양녕은 돌아와 골똘히 생각에 잠겼지요.
‘이 나라 제일의 풍류객인 나를 이 나라 제일의 색향인 곳에 보내놓으시고 여색을 멀리하라니……. 주상께서도 정말 너무 하셨어…….’
그날따라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고, 뜰에는 예쁜 꽃들이 피어 있었지요.
그때 어디선가
애잔한 가야금 소리에 맞춰 청아한 여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왔어요.
상부련(想夫戀)의 노래는 정읍사(井邑詞)였어요.
저자에 가시었나요
어긔야 진 데를 밟으실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
양녕의 가슴은 어느덧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때 마침
군졸 두 사람이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를 데려와 양녕 앞에 엎드리게 하지않겠어요.
“그래 이 밤중에 무슨 일이냐?”
“나으리, 이 여인이 담을 넘어왔기에 잡아왔사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필시 곡절이 있을 터……. 사연이나 한 번 들어봐야겠다. 이 보시게, 그래, 무슨 까닭으로 월장(越牆)을 하였는가?”
양녕의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고, 가슴은 방망이질 쳤지요.
수많은 여인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마음을 뒤흔든 절세가인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지요.
“소녀는 정향이라 하옵니다. 지난 해에 지아비를 잃고 오늘 밤이 지아비의 제삿날이라 상에 올릴 제수를 마련했사온데 도둑고양이가 고기를 물고 도망치기에 쫓아온다는 것이 그만 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정향은 울먹이며 대답했지요.
“그래 어디로 해서 들어왔는가?”
“소녀의 집은 객사와 이웃하여 있사온데, 객사의 담이 무너져 드나들 수 있는 틈이 생겼사옵니다.”
“그런거라면 어찌 자넬 책하겠는가? 돌아가도 좋네.”
“고맙사옵니다.”
정향은 허리를 굽히고 물러갔지요.
'과연 듣던대로 평양은 조선 제일의 색향이로다. 저리 예쁜 여인은 내 일찍이 본 바가 없으니…….'
양녕은 자기도 모르게 정향이 들어왔다던 담 쪽으로 가보았어요.
거기엔 정말 작은 구멍이 나 있었지요.
‘이 대로 그냥 담을 넘어버릴까? 허나, 주상과의 첫 약조를 어찌 저버린단 말인가? 아니야, 기생도 아니고 주인 없는 몸인데 몰래 한 번 만난다면 소문 날 리가 없을 테지. 더구나 멀리 한양의 구중궁궐에 있는 주상이 어찌 알 것인가?’
마침내 넘지 말아야 할 담을 넘어서고 말았어요.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문은 반쯤 열려 있었지요.
양녕이 헛기침을 하자 정향이 놀라며 물었어요.
“뉘신지요?”
“날쎄, 이 사람아…….”
양녕이 점잖게 대답했어요.
그러자 정향은 은장도를 뽑아들었어요.
“이 깊은 밤중에 청상과부의 집에 몰래 들어와 그런 무례한 말씀을 하시오.
썩 물러가지 않는다면 이 칼로 자결할 것이오.”
양녕은 당황했어요.
“진정하게, 이 사람아!
좀 전에 객사 뜰에서 만난 사람일세.”
“아니?
존귀하신 나으리께오서 누추한 이곳에 어인 연고로……?”
“달도 밝고 잠이 오질 않아 뜰을 거닐다가 나도 모르게 발길이 이쪽으로 이르지 뭐겠나!”
“예까지 오셨는데 잠시 쉬었다 가지지요.”
“고맙네”
“존귀하신 어른을 모시게 되었으니 함자나 알았으면 하옵니다.”
“자네만 알고 있게. 나는 주상 전하의 형이 되는 양녕대군인데, 이곳 평양에 잠시 머물게 되었네.”
“그러셨군요.”
“오늘 제사를 지냈을 터인데 귀인이 왔는데도 술 한 잔 안 준단 말인가?”
“잠시만 기다리소서.”
잠시 후 주안상이 들어왔지요.
“ 소녀 한 잔 올려도 되올지요?”
“고맙네.”
“과연 술맛이 일품이로다! 자, 자네도 한 잔 하게나!”
“술을 마셔보지 않아서…….
그럼 딱 한 잔입니다.”
“알았네.”
그나저나 오늘 밤 이것도 큰 인연인 듯하니 부담 없이 한번 놀아보세.
“오늘 달빛이 밝은데 등불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운치 있게 마셔보세.
“술이란 서로 주고받으며 마셔야 맛이 나는 법……. 자, 어서 잔을 받게나.”
양녕은 정향에게 잔을 주는 척하며 정향의 손목을 덥썩 잡지않겠어요.
“에그머니!”
“쨍그랑!”
상 위로 잔이 떨어지며 깨지는 소리가 났지요.
“이런, 이젠 잔이 깨졌으니 술도 다 마셨군. 이보게! 우리 이제 잠이나 자세!”
양녕은 정향을 끌어안고 옆으로 쓰러졌어요.
“점잖으신 나으리께서 이게 무슨 짓이옵니까? 소녀를 놓아주소서!”
정향은 발버둥쳤지만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남자의 품을 벗어나기는 어려웠어요.
양녕은 정향이 그럴수록 더 세게 끌어안았지요.
“자네의 행동은 더 세게 안아달라는 뜻으로 보이는군”
“아아……!”
정향의 저항도 신음소리와 함께 약해져가기 시작했지요.
“나으리, 절 사랑하시옵니까?”
“그야 사랑하니 이렇게 찾아왔지! 자넨 날 사랑하지 않는가?”
“소녀도 나으리를 사랑하옵니다.”
“정향이!”
“나으리!”
그날 밤 두 사람은 몇 차례나 격정의 순간을 치룬 후 잠에 골아 떨어졌지요.
양녕은 그 일 이후 저녁이면 어김없이 정향의 집을 찾았어요. 두 사람은 날이 갈수록 정이 깊어만 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나으리, 소녀의 소청 한 가지만 들어주시겠사옵니까?”
“어디 한번 말해보게."
"소녀 아직까지 한번도 한양 구경을 못했사옵니다. 하오니 소녀에게 한양 구경을 시켜주실 수 있겠는지요?”
“한양 구경을……?”
“그러하옵니다.”
“이를 어쩐다?”
양녕이 탄식하듯 힘없이 말했어요.
“실은 내 한양을 떠나올 때 주상전하와 약조한 게 있었네.”
“그게 무엇이옵니까?”
“이번 여행 동안 기방 출입을 삼가고 기생의 유혹도 물리치겠다 하였네.
청상과부인 자네와 정을 나눈 사실을 주상께서 아신다면 큰일이 아닌가!”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다지도 박복하단 말인가.”
정향은 가슴을 치며 신세한탄을했지요.
어느덧 양녕대군이 평양에 머문 지 20여 일이 지나
작별 인사겸 정향과 마지막 밤을 보내고자 그녀의 집을 찾았지요.
“어서 오시지요, 나으리. 그렇지 않아도 주안상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고맙네.”
“나으리, 마지막으로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징표로 치마에 시 한수라도 써주십시요 .....
“그럼 지필묵을 가져오게.”
이윽고 양녕은 붓에다 먹을 찍어 자신이 구상한 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어요.
別路香雲散 (별로향운산)하니,
離亭片月鉤 (이정편월구)라.
可憐轉輾夜 (가련전전야)에
誰復慰殘愁 (수부위잔수)라.
이별길 서럽다 구름만 흩어지고
헤어지는 정자 위엔 조각달만 걸렸어라.
가엾어라! 임 그리워 잠 못 드는 밤에
뉘 다시 이내 시름 달래어주려나.
“어떤가?”
“시가 소녀의 심금을 울리옵니다.”
“허면, 한 수 더 지어도 되겠는가?”
“예, 나으리.”
양녕은 다시 먹물을 찍었지요.
難 難
爾難 我難
我留難 爾送難
爾南來難 我北去難
空山夢尋難 塞外書寄難
長相思一忘難 今相分再會難
明朝將別此夜難 一盃永訣此酒難
我能禁泣眼無淚難 爾能堪歌聲不咽難
誰云蜀道難於乘天難 不如今日一時難又難
어렵고
어렵구나.
그대도 어렵고
나도 어렵구나.
이 사람은 머물기 어렵고
그대는 보내기 어렵구나.
그대는 남으로 내려오기 어렵고
나는 북으로 다시 찾기 어렵네.
적적산중 깊은 밤에 꿈에 보기 어렵고
험난한 변경에서 글 띄우기 어렵구나.
언제나 그리워 한번 잊기 어렵고
이제 서로 헤어지면 다시 보기 어려워라.
내일 아침 헤어지려니 이 밤 새기 어렵고
잔 들어 이별할 새 이 술 먹기 어렵구나.
이 내 심정 안타까워 눈물 참기 어렵고
그대 노래 서글퍼서 목 안 메기 어렵네.
그 누가 말했던가 촉나라 길 오르기가 하늘보다 어렵다고
당치도 않는 말씀 오늘 이 한때의 애끓임만 못 어렵네.
정향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지요.
“자네 마음에 드는가?”
“그렇사옵니다.”
나으리, 제 이름을 넣어서 한 수더 지어 주실 수 있을런지요?”
“내 자네의 간청을 무슨 수로 거절하겠는가? 치마를 이리 펴게!”
“고맙사옵니다.”
정향이 치마를 다시 펼치자 양녕은 붓을 들어 먹물을 찍었어요.
一別音容兩幕逅 (일별음용양막후)
楚臺何處覓佳期 (초대하처멱가기)
粧成玉貌人誰見 (장성옥모인수견)
愁殺紅顔鏡獨知 (수살홍안경독지)
夜月猶嫌窺繡枕 (야월유혐규수침)
晩風何事捲羅帷 (만풍하사권라유)
庭前賴有丁香樹 (정전뢰유정향수)
强把春情折一枝 (강파춘정절일지)
그대 한번 작별하면 만날 길 아득한데
초대 어느 곳에 아름다운 기약 찾나.
예쁘게 단장한들 그 누가 알아주리
시름 띤 고운 얼굴 거울만이 알리라.
달빛은 얄밉게도 베갯머리 스며들고
새벽 바람 무슨 일로 비단 장막 휘날리나.
뜰 앞에 향기로운 정향(丁香)나무 서 있기에
춘정(春情)에 한 가지 꺾어보았다네.
“나으리, 절 힘껏 안아주소서!”
“이렇게 말인가!”
양녕은 정향과 밤새 얘기를 나누다 새벽녘에야 객사로 돌아왔지요.
다음날 평안감사의 전송을 받으며 상경길에 오른 양녕의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듯 아팠지요. 짧은 인연이면서 너무도 깊은 인연이었어요.
양녕은 한양에 도착하여 곧 대궐로 향했지요.
“형님, 어서 오세요. 그 동안 객고가 크셨을 줄 압니다.”
“전하께오서 염려하여 주신 덕분에 유람을 아주 잘 했사옵니다.”
“그래요? 형님께서 좋은 여행이 되셨다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헌데, 약조하신 대로 기방 출입은 아니하셨을 테지요?”
세종이 웃으며 물었지요.
양녕은 가슴이 뜨끔했지만 태연하게 대답했어요.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형님의 여독을 풀어드리고자 효녕 형님 댁에 조촐한 주연을 마련했사오니 함께 가시지요?”
“전하,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이윽고 양녕을 환영하는 연회가 벌어졌어요.
“형님, 그 동안 여행하시느라 얼마나 객고가 크셨습니까? 제가 기방출입을 허락했어야 하는 건데……. 자, 한 잔 받으시지요.”
“아니옵니다. 소신이 전하께 먼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오늘은 형님을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 제가 먼저 한 잔 올리겠습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형님, 진정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으셨습니까?”
양영은 가슴 조이며 심호흡을 한 후 대답했지요.
“신이 어찌 감히 전하를 속이오리까?”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세종은 악공과 기생들에게 명했어요.
“어서 풍악을 울리도록 하라!”
“예!”
음악과 함께 노래가 들려왔지요. 그런데 뭔가 이상했어요.
一別音容兩幕逅 (일별음용양막후)
楚臺何處覓佳期 (초대하처멱가기)
粧成玉貌人誰見 (장성옥모인수견)
愁殺紅顔鏡獨知 (수살홍안경독지)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그것은 틀림없이 정향의 치마폭에 징표로 써준 시가 아니겠어요? 노래가 계속 이어지고 양녕은 귀를 곤두세웠어요.
庭前賴有丁香樹 (정전뢰유정향수)
强把春情折一枝 (강파춘정절일지)
한 구절도 틀림없는 양녕 자신의 시였어요.
‘우연의 일치겠지. 나와 정향 두 사람만이 아는 시인데 어찌 이곳에서 알고 부르겠는가?’
양녕은 다시 노랫소리를 경청하였지요.
別路香雲散 (별로향운산)
離亭片月鉤 (이정편월구)
可憐轉輾夜 (가련전전야)
誰復慰殘愁 (수부위잔수)
‘어떻게 한 자도 틀리지 않고 내 시와 똑같을 수가 있을까? 이건 분명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야. 주상께서 필시 정향과의 관계를 눈치 챈 것이 분명하구나. 헌데, 주상은 태연하기만 하니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군.’
양녕이 골똘히 이런 생각에 잠겨 있자 세종이 물었지요.
“형님,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양녕이 당황하며 대답했어요.
“한 잔 더 드시지요.”
“예, 전하.”
양녕은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내려놓고 다시 춤을 감상했지요.
그때 춤추고 있던 한 기생의 치마에 무슨 글씨 같은 것이 써 있는 것이 양녕의 눈에 들어왔어요. 순간 양녕은 입을 다물수가 없었어요.
‘아니? 이럴 수가!’
그녀는 다름 아닌 정향이었어요.
그녀는 양녕을 보자 살포시 미소를 띠었지요.
양녕은 일이 이미 탄로났다고 생각하고 세종 앞에 부복했지요.
“전하, 신이 전하를 기만하였사오니 신을 벌하여 주소서.”
순간 음악과 춤이 멎었지요.
세종은 의아한 표정으로 양녕에게 물었어요.
“형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실은 신이 평양에 들렸을 때 남몰래 여색을 가까이 하였나이다. 전하의 성지(聖旨)를 어겼사오니 신을 벌하여 주소서.”
양녕은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대답했지요. 그러자 세종이 양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형님. 사죄를 해야 할 사람은 형님이 아니라 이 아우입니다. 형님을 떠나보내고 가만히 생각하니 제가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서 평안감사에게 밀지를 내려 어떻게든 형님을 모시도록 했던 것입니다.
객고를 푸셨다면 큰 다행이겠습니다. 부디 형님께 미리 알리지 못한 점 용서하십시오.”
“황공하옵니다.”
양녕은 머리를 조아렸지요. 이제야 모든 전후 사정을 알았지요.
세종은 양녕에게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을 하자
양녕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졌지요.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형님, 오늘 이 자리는 형님을 위로하기 위한 자리오니 마음 편히 노십시오.”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니다.”
세종이 정향을 돌아보고 명했지요.
“정향인 어서 형님께 잔 올리지 않고 무엇 하는고?”
“예, 전하. 나으리, 소녀의 술 한 잔 받으시지요.”
정향이 따르는 술을 받아든 양녕의 손은 떨렸고, 가슴은 방망이질 쳤어요.
“고맙네. 오랜만에 만났구먼.”
양녕은 정향과 오랜만에 만나 못 다한 얘기를 맘껏 나누었지요.
얼마의 시간이 더 흘렀을까!
세종이 양녕에게 웃으며 말했어요.
“형님, 형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정향을 곁에 두고 지내시지요.”
“그리 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미리부터 이렇게 해드리려고 함께 살 집까지 마련해두었습니다. 부디 정향과 함께 행복하게 사십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주연을 마치고 정향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양녕의 마음은 세상을 얻은 듯 기뻤어요.
왕좌도.. 부귀도.. 영화도 훨훨 다 날려버리고 얻은 것은 겨우 사랑하는 기생 정향이었으나 양녕에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지요.
그는 하늘을 향해 외쳤어요.
“부귀영화가 일장춘몽(一場春夢)인 것을... 내 팔자가 상팔자로다!”
이제 그에게 짐 따윈 없어졌고 모든 욕심을 벗어던지니 날아갈 듯 홀가분했지요. 마치 새장 안에 갇혔던 새가 넓은 세상으로 나온 것처럼... 드디어 양녕의 시대가 활짝 도래한 것이었지요.
그 후 두 사람은 아들, 딸 많이 낳고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며 백년해로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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