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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입 속에서 나온 동백꽃 세 송이 (어른을 위한 동화)◁

채운(彩韻) 신다회 2009. 4. 20. 21:58

▷ 입 속에서 나온 동백꽃 세 송이 (어른을 위한 동화)◁

 

조용한 아침 매화


땅을 딛고 걸어다니는 이들은 밤이면 잠을 잔다.

사람도 잠을 자고, 짐승들도, 심지어 벌레들도 잠이 든다.
반면, 물고기까지 깊은 잠속에 떨어져 있는 한밤중에 살며시 깨어나는 이들이 있다.
땅에 뿌리를 내리거나 한자리에서 백년이고 천년이고 고요히 머물러 있는 이들이다.
나는 간혹 이들의 소리 없는 대화를 알아듣기 위해 밤잠을 설치곤 한다.

깊은 밤에 깨어나 창호 밑에 기를 모으면 이들의 소리 없는
소리가 낙수처럼 고여 드는 것이다.
얼마 전에 나는 이국의 하늘 밑에서 이 소리 없는 대화를 들은 것이 있다.

그것을 여기에 옮기려고 한다.
그러니까 일본 니야기 현 마쓰시마의 서암사라는 절에 갔을 때였다.

주지스님의 안내를 받아 걸어가고 있는데 어째 자꾸만 뒤가 돌아보였다.

누군가가 눈길을 보내고 있는 듯한.그렇다. 골목길을 나오다가,

또는재를 넘거나 할 때 뒤가 돌아보여
돌아보면 눈길을 주고 있는 어머니며 친구를 본 적이 있지 않은가.
내가 그곳에서 뒤돌아본 거기에는 그림 속에서나 보아 온 용의 자태를 닮은 쌍둥이
나무가 있었다.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 아름드리 두 그루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주지스님이“저 나무에 관심이 있으시군” 하며 그 쪽으로 발길을 잡아주었다.
나무 앞에 이른 주지스님이 설명하였다.

“이쪽은 붉은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고, 저쪽은 하얀 꽃을 피우는 매화나뭅니다.

우리나라의 천연 기념물이기도 한데 사실은 이 두 나무의
고향은 한국입니다.”
나는 갑자기 손끝 발끝으로 흐르는 전류를 느꼈다.

나뭇가지에도 같은 느낌이 흐르는지 살짝 끝이 흔들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임진 전쟁 때 출정했던 우리네 장수 가운에 이곳 출신인 다테 마사무네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1593년, 그러니까 꼭 400년 전이구만요.

 그 사람이 조선에서 돌아오면서 이 두 그루 매화나무를 가지고 와 여기에 심은거지요.”
나는 가슴이 `컥` 막히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이렇게 여기서도 살고 있었군요.`

나는 나무 밑둥을 쓰다듬으며 꾸벅 절을 했다.
그러자 나뭇가지들이 갑자기 눈물을 참고 있는 노인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이내 바람 자락이 흐느낌처럼 우리를 휘감고 지나갔다.
그날 밤 나는 경내에 잠자리를 얻었으나 좀체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풍결도 졸고 석등도 가물가물 졸 무렵이었다.

나는 아득히 들려오는 소리없는 대화를 들었다.

자네, 오늘 낮에 그 고국 사람 보니까 어떻던가?”
“갑자기 고향 생각이 치밀어서 좀 울었네.”
“나도 마찬가지였네. 늙어갈수록 고향이 잊혀지기는커녕 새록새록 생각 키우니 이거 원....”
 “아, 그럼. 노오란 초가 지붕들도 아른대는걸.”
“물동이 이고서 흐르는 물을 걷어 내던 하얀 손의 새악시도 생각나는군.”

“지금 이맘때면 눈 살쩍 덮여 있던 파란 보리밭도 있었지.“아침 저녁으로 밥 짓는 청솔 연기가
소올솔 오르던 마을 정경은 어떻고.” “이 빠진 입으로 호물호물 잘 웃으시던
그 할머니는 옛날 옛날에 돌아가셨겠지?”
“그렇고말고. 그 할머니의 몇대 손도 벌써 할머니가 되었을걸.”
“참, 우리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는 몰라.”
“잘 자랄거야. 녀석들, 고향으로 갔으니 얼마나 좋을까.“자네나 내가 고향 가지 못하는 슬픔에서
꽃을 더 많이 피운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까?”
“모를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꽃을 아름다움 이라고 생각하지 슬픔이라고 여기지는 않으니까.”

“자, 첫닭이 울 때가 되었네. 이제는 우리가 들어갈 때네.”
얼마 후.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또 얼마 후 법당으로부터 예불 드리는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나는 왠지 슬퍼져 잠시 울었던 것 같다.
베갯잇이 축축히 젖어 있었다.

무슨 소리가 다시 났다.나는 일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주지스님이 대비로 마당을 쓸고 있었다.

나는 주지스님께 물어보았다.
“혹시 저 매화나무들한테 아이들이 있는지요?”
주지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였다.

“지난해에 고향으로 데려가겠다는 분들이 있어 홍매와 백매 서른 가지씩을 접붙여서 보내드렸지요.
아마 지금쯤 저희 고국 땅에서 뿌리를 내렸을걸요.”

나는 매화나무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꽃망울이 벙글고 있는 매화 가지에 먼데 안부처럼 눈발이 조용히 내려
앉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꾸며 낸 것이 있다면 매화나무 끼리의 대화 부분이라고 하겠으나 이것조차도 작자의 능력이 못 미쳐 더 잘 형상화해 내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기막힌 `매화나무` 사연은 1991년 9월 28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출처 : 비사벌로 가는 길
글쓴이 : 웹관리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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