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몽 /김신용
햇볕 포근한 겨울 담벼락에 쪼그리고 있었죠. 구걸을 위해, 깡통을 품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그때, 지나가던 어떤 귀부인이 만 원권 한 장을 내밀더군요. 이크, 이게 웬 떡이야! 얼마나 황송했던지 전 뜨거운 물 속의 두족류처럼 온몸을 오그라트렸죠. 그런데 이건 무슨 조화죠? 그날부터 그 귀부인은 날마다 겨울 담벼락에 나타나 돈을 주고 가더 군요. 대체 내 남루가 얼마나 그녀의 淚腺(누선)을 자극했는지, 하루도 빠짐없이 내 깡통 속에 차오르던 그 포만감 이란 -,그러나 빈대도 낯짝이 있지, 그 고운 마음에게 조금이나마 보답을 하고 싶어 어느 날, 그녀의 뒤를 몰래 미행했 죠, 그녀가 들어간 야옥집은 호화로웠지만 인적기 하나 없이 조용했고, 그 새벽, 전 그 적막의 높은 담을 넘었죠. 그리 고 그 넓은 정원을 깨끗이 비질을 했고, 정갈하게 떠오른 마당을 보며 다시, 소리없이 내 구걸의 담벼락으로 돌아와 귀 부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곤 했죠. 그 적선과 보은의 숨바꼭질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모기침에도 염치가 있지. 저는 그 겨울의 담벼락을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안개비가 우수처럼 내리는 새벽, 다시 그 높은 담을 뛰어넘어 마지막 비질 을 끝냈을 때, 등뒤에서 인기척을 느꼈죠. 아, 당신이었군요. 뜨락을 쓸어주신 고마운 분이! 그녀는 감동으로 떨리는 손길로 제 손을 잡아 이끌었고, 오, 목욕부터 시키더군요. 巨富의 상속녀, 수많은 재산을 맡길 믿을 수 있는 남자가 없어 혼자 살아왔다는 속삭임을 들으며, 뜨거운 흥분의 김이 피어오르는 탕 속에서, 내 거지의 몰락의 땟국물을 씻고 났을 때, 그녀는 알몸으로 저를 침실에 누이더군요. 누더기에 절여진 몸이지만 아직 젊음이 숨어 있는 내 몸, 꼭 여우 에게 홀린 것도 같았지만 그녀의 눈부신 빛의 나신을 포옹했죠. 그토록 오랜 세월, 물욕 없는 거지의 無爲를 기다렸다 니! 그녀는 흐느끼더군요. 꼭 안아줘요. 꼬옥, 더 꼬옥 -, 제 혼신의 포옹,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얼마나 힘껏 껴안았 던지 갑자기 그녀의 몸이 뿌지직 소리를 내며 쪼그라져버리더군요. 전 얼마나 놀랐던지, 기겁을 하며 깨어보니
아, 어떡하죠? 내 품속에서 다 찌그러져 있는 이 깡통을 -.
*淚線(누선)-눈물샘 *몽유 속을 걷다(실천문학,1998년) 중에서
![]() 김신용
출생:1945년 4월 1일 출신지:부산광역시 직업:시인,소설가 데뷔:1988년 현대시사상 시 '양동시편 - 뼉다귀집' 발표 수상:2005년 제7회 천상병학상, 2006년 제21회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2006년 제6회 노작문학상 대표작: 몽유 속을 걷다, 기계 앵무새, 환상통, 달은 어디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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