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크리스마스 노준옥
바슐라르를 읽다가 갑자기 부엌으로 가서
김장김치 한 포기를 썰지도 않고 죽죽 찢어 서서 먹는다
입안에 가득 한겨울 시린 배추밭이 들어온다
새파란 무우청 줄지어선 무밭도 들어오고
붉은 고추밭도 총총한 마늘밭도 다들 살아서 들어온다
어쩌구저쩌구 고매한 정신에 밑줄 따라 그어가며
한량없이 쫓아가던 나의 정신에 느글거리던 이론에
과감히 고춧가루를 뿌리는 이 한밤의 역설
허구에 시달리며 또한 허구에 목마른 나는
이 긴긴 동짓달 하룻밤을 아름다운 사색으로 채우려 했건만
나의 정직한 식욕은 실체를 원했던 것이다
시뻘건 고춧가루와 노오란 마늘과 시퍼런 파와 청각과 가지가지의 재료들이
망상과 그리움과 고단함과 분노와 욕망과 회한과 무료함과 간절함과
익어가는 여인의 허연 장딴지 같은 배추의 속살에 범벅이 되어
불현듯 아름다워진 나의 크리스마스 저녁
바슐라르 선생
꿀꺽 침을 삼키며 날 쳐다보고 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나태주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늦은 밤거리에 서서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늙은 아내를 생각한다
시시하다 그럴 테지만
밤늦도록 불을 켜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빵 가게에 들러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몇 가지
골라 사들고 서서
한사코 세워주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며
20년 하고도 6년 동안
함께 산 동지를 생각한다
아내는 그 동안 네 번
수술을 했고
나는 한 번 수술을 했다
그렇다, 아내는 네 번씩
깨진 항아리고 나는
한 번 깨진 항아리다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물이 되고 만다
목덜미에 내려 섬뜩섬뜩한
혓바닥을 들이밀기도 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 늦은 밤거리에서
한번 깨진 항아리가
네 번 깨진 항아리를 생각하며
택시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