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논단] 현대시조의 미래를 전망한다/민병기

채운(彩韻) 신다회 2009. 9. 18. 02:16

현대시조의 미래를 전망한다/민병기  

현대시조의 미래를 전망한다.
                                                 민병기(창원대 교수)

1. 시조가 시의 으뜸이 되어야 한다.
21 세기에 시조 부흥이 가능할까. 현대시조가 널리 애독되고, 누구나 그 몇 수쯤은 즐겨 암송하거나 노래
하는 시조의 국민문학 시대가 열린 것인가. 다시 말해 시조가 민족시의 기능을 하는 때가 다시 올 것인가.
이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문제다. 시조가 우리 민족의 정서를 풀어내는 언어율로 가장 적합하며, 시조
가락을 되찾는 일이 한국 현대시의 정체성 확립에서 가장 중요하다면, 그런 시대가 마땅히 와야 한다. 그래
서 현대시조가 당연히 현대시의 으뜸에 자리하며, 시조비평이 언제나 시평의 초점이 되어야 하며, 시조문학
론이 민족문학론의 골자가 되어야 한다.
다행스럽게 최근 몇 년 사이 시조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는 추세이다. 시조 발표지면이 확대되고, 시
조집 발간 수가 많아지고, 시조 전문 홈페이지 개설에 따른 사이버공간을 활용하는 시조 보급운동이 전개되
는 등 시조의 활성화 조짐이 보이고 있다. 또 시조집 100선이 간행되어 시조인들의 마음결에 잔잔한 파문
을 일게 한다. 이를 근거로 시조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장담하기엔 좀 이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조 작품의 양적 증가나 홈페이지 활용은 시조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는 일반적 문화현상에 속한다는 점
이다. 예를 들어 자유시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20 세기 후반에 컴퓨터를 활용한 인쇄술의 발전으로 시
발표의 기회가 많아져, 시인도 시집도 급증했다.  그러나 시의 독자는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이는 문학 전
반에 해당된다. 문인과 작품은 증가했지만, 문학의 순수 독자는 오히려 줄어드는 추세이다. 이는 문학의 양
적 증가와 질적 향상은 별개의 문제요 그 발전과도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시조에 대한 관심이 문인들 사이에 높아지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일반 독자층까지 광범위
하게 확대될 때에 비로소 시조 부흥이 가능하다. 아직 그런 기미를 완연히 느낄 수 없다. 앞으로도 시조 열
기가 대중에 널리 확대되리라고 단정할 수 없는 실정이다.
분명한 것은 시조는 우리 민족의 흥망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주권을 빼앗긴 일제 시대에 시조는
사멸한 과거의 장르로 취급되었다. 시조라면 고시조만 인식하고 현대시조는 의식하지 않는 것이 현대문학
연구가들의 지배적 경향이었다. 학계나 교육계 모두 현대시조를 살아 움직이는 진행형의 장르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풍토였다.
지금도 대학 교육과정에서, 시조는 고전문학으로, 시는 현대문학으로, 연구 대상이 엄격히 양분되고 있
어, 현대시조는 고전과 현대 어느 분야에서도 제외된 실정이다. 고전시가 연구자는 그것이 현대에 씌어졌
다는 이유로, 현대시 연구자는 그것이 과거의 장르라는 이유로, 모두 현대시조를 연구 대상으로 삼기를 꺼
리고 있다. 이 때문에 현대시조의 연구성과가 자유시에 비해 현저히 저조한 실정이다.
鷺山과 李箱을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두 시인에 대한 연구물은 비교되지 않게 李箱이 많다. 반대로 작
품에 대한 인기는 노산이 압도적으로 높다. 근?현대 시인으로 노산만큼 많은 작품이 노래로 불려지는 시
인은 드물다. 이에 비해 李箱詩는 노래화된 것이 한 편도 없다. 노래화는 문학성과 별개이지만, 시의 사회
적 기능을 극대화시키며, 시의 인기도를 반영한다. 李箱처럼 독자 없는 시인연구는 오직 연구를 위한 연구
로 사회적 존재의미가 없다. 이러한 자족적 연구 풍토에서 인기 있는 시조인은 물론 많은 현대시조인들이
현대시 연구의 장에서 소외되었다.
노산의 작품 [가고파], [고향 생각], [봄처녀], [옛 동산], [성불사의 밤], [금강에 살으리랏다], [장안사]
등을 즐겨 노래하는 이들이 작사자가 누구인지는 다 아는데, 그 가사가 시조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상당
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 그렇다. 이는 교육 현장에서 현대시조가 얼마나 소홀하게 다루어졌는가는 말해
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이렇게 현대시조가 연구자들에게 푸대접을 받으며 과거의 장르로 다루어지게 된 까닭이 있다. 이는 모두
20 세기에 서양문화를 무분별하게 선호한 반면에 우리 고유의 것을 무조건 천시하고 멀리했던 근대화의 오
류 탓이다. 이 때문에 한국화보다 서양화에, 고전무용보다 발레에, 판소리보다 아리아에 일반의 관심이 더
많이 쏠렸다. 그러한 시류에 휩쓸려 시조보다 자유시에 대한 인기가 압도적으로 높았으니, 그 결과 자연히
자유시가 현대시의 대명사가 되었고, 현대시 연구도 자유시에 편중되었다.
일제 시대에 시조가 과거의 장르로 취급되었다가, 분단시대에야 비로소 회생하여 현재의 장르로 인정받고
있지만, 일반인의 관심밖에 있는 소외된 장르이다. 비정형시(자유시와 산문시)는 물론이요 심지어 고시조만
큼도 현대에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근대화의 오류를 말끔히 청산하지 못한 문화의 주변국이요, 완전 자립
과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우리의 처지에서 그것은 당연한 한계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우리 나라가 통일이 되어 부강한 자립국가로 성장한다면, 그 때 시조의 위상은 어떻게 될까. 한국
이 아시아의 주도적 국가로 발전해도 시조문학 시대가 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영상매체가 대중문화를 지
배하는 위력은 더욱 커져, 영상문학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 이후의 시대에도 시 장르가 존속되며,
그 때에 비로소 시조가 자유시보다 우위를 차지하여 현대시의 핵심에 자리할 것이다.
그렇게 예측하는 이유는 비정형시의 산문화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시 장르의 생명은 음악
성, 간결성, 상징성인데, 산문화 경향은 이러한 시 특징의 상실로 이어진다. 그 결과 비정형시는 갈수록 독
자들에게 외면당하여 쇠퇴하게 된다. 반면에 정형시인 시조는 음악성(4음보율), 간결성(단시조), 상징성 등
시의 본질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으니, 당연히 시의 중심을 차지할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시조가 시의 대
명사가 되고, 시조비평이 늘 시비평의 초점이 되고, 시조문학론이 민족문학론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조가 자유시를 지나치게 추종하거나 또는 고시조의 수준으로 안주한다면 잃었던 제
자리를 영영 되찾지 못할 것이다. 시조는 영원히 고시조형으로 남아야지 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시조의
장래를 전혀 내다보지 못하는 쇠퇴지향의 논리일 뿐이다. 시조가 현대화해야 자유시와 경쟁하여 그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자유시에서 취해도 좋은 부분과 안 될 부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해 고시조의 형식미로 고수해야 될 부분과 시대에 따른 현대시조의 변화를 인정해야 될 부분에 대한 분
명한 인식이다.
노래 위주의 고시조에서 읽기 중심의 현대시조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 변화는 불가피했다. 가장 두드러
진 변화가 외형상 행 배열의 자유화이다. 3 장을 3 행으로 구분하지 않고, 행을 짧게 구성하는 시조가 많아
졌다. 이를 일반화시킨 선구자는 鷺山이다. 그는 1976년에 {鷺山時調選}을 간행했다. 이 선집은 이미 발표
한 시조를 재수록한 것인데, 이때 시행을 원래와 다르게 재배치했다. 전에 한 수가 3 행이던 시조를 모두 7
행으로 재구성했다. 이는 시조도 자유시처럼 행을 자유롭게 구성해야 한다는 그의 평소 주장을 실천한 것이
다.  이것이 짧은 시행의 시조가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시조 구성의 자유화
그러나 단순히 시각적 효과만 노린다거나 아니면 기계적으로 행을 짧게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짧
게 나누어야 할 필연성이 의미나 기법의 구조상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다음 시조가 이를 잘 예증한다.

의붓어미 그늘에서 풀물 든 설움이야
떫은 보릿고개 도토리랑 삼켰다마는

民籍에
퍼렇게 앉은
식민의 피는 못 지웠다.

뼈마디 물러앉고도 못 벗은 징용살이
동자 깊이 박고 간 황토빛 타는 산천

풀꾹새
뭉개진 울음
쑥빛으로 물드나.
   박재두 [쑥물 드는 신록] 전문

이 시조는 초장과 중장은 각각 1 행이고, 종장은 3 행이다. 또 종장만 한 연으로 구분되어 있다. 즉 두
수 모두 동일하게 2 연 5 행으로 독특하게 구성되었다. 이 구조는 단순히 시각적 효과만 노린 행의 자유
화가 아니고, 작가의 치밀한 구성의식에 따른 의도적인 행과 연의 배치이다. 시를 꼼꼼히 읽어볼수록 그
사실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초장과 중장 "의붓어미 그늘에서 풀물 든 설움이야/ 떫은 보릿고개 도토리랑 삼켰다마는"은 한 문장 성
분을 갖춘 의미단위, 즉 '설움을 삼켰다'이다. 그러니 하나의 연이 효과적이다. 초장의 이미지들은 모두
'설움'을 수식하고 있어, 한 행으로 처리한 것이 적절하다. 또 중장에서 "삼켰다"의 대상은 " 도토리"이니,
양자는 서로 가까울수록 의미전달에 효과가 있다.
둘째 수도 첫 수와 동일하게 연과 행을 구분했다. "뼈마디 물러앉고도 못 벗은 징용살이/ 동자 깊이 박
고 간 황토빛 타는 산천"이라는 초장과 중장은 의미상 동일구조, 즉 <A는 B이다>라는 비유구조다. 요약하
면 ' 징용살이/ 황토빛 타는 산천'이다. 이렇게 하나의 비유구조이니 한 연으로 묶어야 효과적이다. 초장
내용은 모두 징용살이를 꾸미고 있으니 한 행이 적합하다. 종장 또한 모두 산천의 이미지를 수식하니 한
행이 적절하다.    
그러나 중장에서 종장"民籍에/ 퍼렇게 앉은/ 식민의 피는 못 지웠다"로 넘어갈 때 많은 의미 비약이 있
다. 따라서 종장을 별도의 연으로 구분한 것이 타당하다. 또 종장의 시행을 짧게 나눈 것도 '民籍', '퍼렇
게 앉은', '식민의 피' 등의 이미지가 모두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고 상징성도 강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절하다. 이렇게 의미 전개상 필연성에 따라 연과 행이 구분되고 있다. 그만큼 의미에 대응하는 형식의
구조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시조 읽는 또 다른 묘미이다.
만약 위와 다르게 이 시가 구성되었다면, 의미와 형식이 조화된 구성미는 사라졌을 것이고, 시조 읽는
독특한 재미도 반감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시각적 효과만 노리는 것이 아니라, 의미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여 치밀하게 행과 연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행의 자유화는
내용과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구조미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극명히 느끼게 된다.
이 시조는 한 수가 한 문장구조이다. 첫 수의 문장성분을 압축하면 '설움이야/ 삼켰다마는/ 피는 못 지
웠다'요, 둘째 수는 '징용살이/ 타는 산천/ 울음/ 쑥빛으로 물드나'이다. 이들은 비록 문장구조를 지니고 있
지만, 일반 산문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 그것은 단순히 행과 연의 구분 문제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이유
가 있다. 그것은 많은 시어들이 상징적으로 쓰이고 있어 다의적 의미를 머금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 시어
들을 세밀하게 분석해보면 그것이 분명해진다. 
첫 수 초장의 '의붓어미'는 개인 체험의 차원이기보다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식민
의 피'나 '징용살이' 같은 시어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니 "의붓어미 그늘"은 타민족의 지배 즉 일제
하를 상징하는 의미이다. "풀물 든 설움"은 가난의 고통을 상징한다. 농촌에서 곡식이 동나면 풀뿌리를 캐
어 먹으니, 이때 풀물이 잘 든다. 그러니 "풀물 든 설움"이란 기아의 고통을 말한다. "보릿고개 도토리"도
같은 의미이다. 식량이 부족하면 풀뿌리와 함께 먹는 것이 도토리이다. 일년 중 식량이 제일 부족한 때가
늦봄 보리를 타작하기 직전이다. 그래서 보릿고개란 말이 생겼다. 풀뿌리나 도토리 등으로 연명하는 배고
픔보다 참기가 더 어려운 고통은 무엇인가.
그것은 종장에 숨겨있다. "민적에/ 퍼렇게 앉은"에서 '민적'은 호적이요, 이에 '퍼렇게 앉은/ 식민의 피'는
창씨개명을 한 글자요, 또 "피"의 내포적 의미는 상처나 희생이다. 이들을 모두 결합하면, 그것은 일제의
한글말살 정책으로 받은 피해의 흔적을 상징한다. 그것을 "못 지웠다"라고 표현했으니, 강압 정책으로 받
은 정신적 상처는 보릿고개의 굶주림보다 더 견딜 수 없어서,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일제에
게 당한 물질적인 약탈보다 정신적 문화적 손실이 훨씬 심각함을 말한다.
둘째 수 초장 "뼈마디가 물러앉고도 못 벗은 징용살이"의 상징적 의미는 깊다. 2차 대전 중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것이 징용이다. 당시 젊은이들이 징용에 끌려가 죽거나 아니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동물 취급당하며 강제로 노역을 했다. 그보다 더 힘든 징용은 무엇인가. 시인은 이를 분명히 표현하지 않
고, 다음 중장으로 암시만 했다.
"동자 깊이 박고 간 황토빛 타는 산천"이다. 여기서 "동자 깊이 박고 간"이란 '눈동자에 깊이 박혀 영영
잊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대상은 '황토빛 타는 산천'이다. '황토빛'은 붉은빛으로 피빛과 같다. 그러
니 "황토빛 타는 산천"은 "피빛으로 타는 산천" 즉 "피로 물들 산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중장의 의미는
수많은 청년들의 鮮血로 물들었던 6.25의 처참한 광경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상
징적 의미를 유추하면 그 뜻이 다음 종장과 잘 접맥된다.
"풀꾹새/ 뭉개진 울음/ 쑥빛으로 물드나."에서 '풀꾹새'는 뻐꾹새의 속어이다. 이것은 단순한 뻐꾸기 울움
소리가 아니라, 중장의 '피로 물든 산천'이라는 의미를 이어받고 있느니, 전쟁 중에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상징한다. 그 울음에 죽음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뭉개진'이란 수식을 했다. 또 "쑥빛으로 물드나"에서
쑥물은 옷에 한 번 들면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울음이 쑥물 든다는 것은 슬픔이
영영 잊혀지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니 전쟁의 피해와 후유증이 오래감을 강조하기 위해 시인은 '쑥물'의
이미지를 활용했고, '동자 깊이 박고 간' 것으로 표현했다. 
이 시는 한국 현대 비극사를 잘 반영했다. 시적 성공은 비극적 사건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것을
상징화한 대목에서 더욱 빛난다. 식민지 수탈이니 탄압정책이니 또는 태평양전이니 6.25니 그런 말을 시
조에 바로 썼다면, 오히려 이 작품의 품격은 훨씬 떨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쓰지 않고, 첫 수에서 일제의
피해를, 둘째 수에서 양 대전의 수난과 희생을 상징적으로 표현했기에 높이 평가받게 된다. 또 이 때문에
이 시조가 비록 문장 구조를 지녔지만 시적 형상화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작품을 꼼꼼히 살펴볼수록 시적 우수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 시조는 '의붓어미 그늘'로 시작된다. 일
제의 지배 때문에 우리 민족의 모든 수난과 전쟁의 비극이 비롯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시인은 맨 앞에
이 말을 썼다. 이어서 풀물이나 쑥물같이 지워지지 않는 빛의 이미지로 비극의 상처가 깊어 영영 잊혀질
수 없음을 강조했고, 또 뻐꾸기 울음같이 흔한 소리 이미지로 전쟁이 민족 전체의 수난이라는 그 보편성
을 강조했다. 이렇게 주제 의식이 시 전체에 일관하고 있다.
현대사의 비극을 이처럼 간결하게 표현했으니 놀랍지 않은가. 주제가 보편적이고 뚜렷하면서, 그것이
상징적 표현으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보기 드문 세기의 절창이다. 이처럼 좋은 작품이 지
금까지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 시가 자유시가 아닌 시
조로 발표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은이가 향토 문인이기 때문일까. 어째든 소중히 기억해야 할 작품이
다.
다음 시조 또한 행의 구조미가 뛰어난 작품이다.

내 오늘
서울에 와
萬坪 寂漠을 산(買)다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까부다

바닥난
호주머니엔
주고 간 벗의 名銜…---  서벌 [서울.1]
 
이 시조는 9 행 3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마다 연을 구분했고, 시행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 만약 이 작
품을 3 행 1 연으로 평범하게 구성했다면, 이 작품을 읽는 묘미는 훨씬 감소했을 것이다. 그만큼 구성미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시행의 자유화를 잘 활용하여 성공한 대표적 시조이다. 그 성공은 의미와 형식의 조화에
있다. 이 시조를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것이 분명해진다.
초장에 객지에서 느끼는 화자(나)의 외롭고 쓸쓸한 감정이 잘 그려져 있다. 외로움이란 타인과의 단절에
서 오는 감정이니, 짧은 시행은 단절성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만평 적막을 산다"에서 가슴속을 꽉 채우
는 적막감을 '만평'이라는 공간 이미지로 바꾼 것이 기발한 착상이다. 또'산다'는 말로 고독 그 자체를 즐기
는 화자의 선비정신을 은근히 드러냈다.
초장과 중장 사이에 이미지의 비약이 있으니 연을 나눈 것이 효과적이다. 또 짧은 시행이 뒤로 전개될수
록 점점 길어지면서, 적막감이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사방으로 막 흩뿌려지는 시각적 효과를 주고 있다.
그만큼 의미와 행의 배열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시에서 '만평'이나 '안개'나 '가랑비'는 모두 고독감을 설명하기 위한 시각적 이미지로 보조개념이다. 이
들은 외연상 거리가 먼 것으로 행을 나누는 것이 타당하다. 이들의 비유적 결합이 참신한 만남이어서 시적
긴장감을 주고 있다.
중장과 종장 사이에도 시상의 비약이 커서 시조의 구조미가 한결 살아난다. 비록 상황 설명은 생략되었지
만 그 유추가 가능하다. 화자는 외로움을 달래려 친구를 찾아간다. 그러나 기대했던 친구들의 태도는 야박
하다. 그들은 아무런 대접도 하지 않고 단지 명함만 건넨다. 명함의 이미지 속에 친구들의 비정한 냉대의
의미가 담겨있다. 이로 인해 화자의 외로움은 절정에 달한다.
이렇게 시인은 서울 거리를 방황하는 빈 털털이 화자를 내세워 현대인의 고독을 잘 표현했다. 화자의 외
로움은 1연에서 '만평'으로 시각화되고, 2연에서 사방 천지로 확대되고, 3연에서 심화된다. 갈수록 적막감이
커지는데, 이는 시행이 갈수록 길어지는 것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시조는 현대인의 고독감을 표현함에
있어, 의미 전개에 맞추어 행과 연을 나누고 있어 구조미가 돋보인다. 행의 자유화로 인해 주제의식이 독자
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시행의 자유화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시행을 길게 나눈 것이 오히려 효과적인
경우도 많다. 다음 시조가 이를 잘 예증해 준다.

무엇이/ 될고 하니/ 쓰레기봉투나 되어
버려진/ 것들 쓸어담다/ 가렵니다
진귀한/ 명품들일랑/ 나의 것 아니어서  --- 서벌 [이제는]

시인은 [서울.1]과 달리 이 시조는 3 행 1연으로 구성했다. 이 작품을 /표로 구분한 것처럼 짧게 행을 나
누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짧은 행의 효과가 전혀 없어 구성에 실패했을 것이다. 시인은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어, 위와 같이 행을 길게 처리했고, 연도 구분하지 않았다. 그런 전통적 구성이 오히려 시의 주제
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시인은 어떤 경우에 행을 짧게 혹은 길게 처리해야 하는지, 그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다. 다음 시조가 그 증거가 된다.

木手가 밀고 있는
속살이
환한 角木

어느 古典의 숲에 호젓이 서 있었나.

드러난
生涯의 무늬
물 젖는 듯 선명하네.

어째 나는 자꾸 깎고 썰며 다듬는가.

톱밥
대팻밥이
쌓아가는 赤字 더미.

결국은
곧은 뼈 하나
버려지듯 누웠네. --- 서벌 [어떤 경영. 1]

이 시조는 두 수의 의미가 긴밀하게 대응되고 있어, 완미에 가까운 시조의 구조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첫 수의 핵심 이미지는 각목이고, 둘째 수의 그것은 뼈이다. 두 사물은 일상적으로 아무런 동질성이 없다.
그러나 시인은 양자 사이의 동일성을 발견하여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시를 음미하며 사려깊이 읽어본 독
자라면, 그 기발한 착상과 적절한 묘사력에 (무릎이라도 치며) 감탄할 것이다. 시인의 천재성이 행간에 번뜩
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조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다른 문재를 타고나지 않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그런 명품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 시행을 짧게 혹은 길게 나누어야 하는지, 그 차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예로 들기에 참으로 적합한 작품이다.
두 수 모두 3 연 7 행으로 불규칙하게 구성되어 있다. 시행의 길이가 비록 들쭉날쭉하지만, 꼼꼼히 읽어
보면 그것이 작가의 치밀한 계산 아래에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첫 수 초장에서 '속살'은 상징적 의
미를 많이 지니고 있어 한 행으로 나누어야 적합하다. 그렇게 하려니 자연 초장을 3 행으로 짧게 나눌 수밖
에 없다. 그러나 중장은 다르다. "어느 古典의 숲에 호젓이 서 있었나."는 의미의 흐름이 빠르고 호흡이 긴
박하여 한 행이 적합하다. 또 초장과 중장 사이에 시간적 흐름을 느낄 수 있어 연을 구분한 것이 적절하다.
종장에서 '생애의 무늬'에 내포적 의미가 담겨 있으니, 한 행으로 처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자연 나머지 행
도 짧게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둘째 수 "어째 나는 자꾸 깎고 썰며 다듬는가.' 도 의미의 흐름이 급박한 점을 고려한다면 한 행 한 연으
로 처리한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나머지 장은 짧은 행으로 구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모두 상징적 의미를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위 시와는 달리 행을 자유화 하지 않고, 다음 시조처럼 고전적 방식으로 나누는 것이 효과적인 경우도 많
다.
 
머리에 햇빛을 인 억새꽃 아름 안고
환한 얼굴 밝히며 강에 드는 저녁 산
접어둔 마음갈피에 숲처럼 병이 깊다

물의 절벽 아래로 산그늘을 부르면
금갈색 도토리가 하염없이 내리고
물거울 주름진 반생 손닿지 않는 여백 

저물 대로 저문 날 흰 띠로 허리 묶고
먼 유랑의 길에 오른 늙은 순례자
가을은 강산 곳곳에 신탁의 불을 켠다
      박권숙, [태화강가에서]

이 시조는 시어 구사에 의미의 함축이나 시상의 비약성이 그렇게 심하지 않고, 오히려 의미의 흐름이 살
가로워 행을 길게 처리한 것이 더 효과적이다. 가지산에서 발원하여 서부 경남을 거쳐 울산만으로 흘러가는
강물처럼 서정의 흐름이 부드럽고 경쾌하다. 그러니 행을 짧게 구분했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미와 행 배치가 조화롭다. 
이 강물은 시인의 마음에 흐르는 강이다. 맑은 강물에 비친 자연미는 바로 시인의 마음결 새겨진 아름다
움이다.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면서 산수의 아름다움과 함께 시인의 순수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세
속적 욕망을 초월한 시인의 순결한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미이기 때문이다. 강의 주변 산기슭에서 불
타는 낙엽을 보고 "신탁의 불"을 발견하는 시인의 눈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머리에 햇빛을 인 억새꽃 아름 안고---[태화강가에서] 초장
의붓어미 그늘에서 풀물 든 설움이야--[풀물 드는 신록] 초장
톱밥/ 대팻밥이/ 쌓아가는 赤字 더미.---[어떤 경영1] 중장

위 인용된 시조처럼 한 장이 하나의 의미 단위로 구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고시조와 달리 현대시조
에서 구단위의 의미 단락이 깨진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현대시조의 변화를 인정해야 자유시와의 경
쟁에서 이길 수 있다.

3. 자유화의 역효과
문제는 행을 자유롭게 구성하느냐 고전적으로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시상 전개의 상황에 맞추어 자유
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꾸어 말하면 자유화했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자유화해도 실패한 작
품은 얼마든지 있다. 다음과 같은 경우가 이에 속한다.

바람이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는 동안
무수히 잘려나간 긴 혀들이 잘리더니

목젖만 남은 눈물이

꽃대 들고 올라온다.  --- 박옥위, [부추]

위 작품의 경우는 3 연 4 행으로 시행을 자유화한 것이 오히려 1 연 3 행으로 구성한 것보다 훨씬 못하
다. 멋대로 자유화해서 구조미가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괜히 행을 짧게 나누거나 연을 자주 구분한다고,
시어의 의미가 오묘해지거나 시조의 격이 높아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직 지면만 낭비할 뿐이다.
고전적 구성을 했다고 그 시조에 고전미가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음 작품이 이를 말해준다.

손놓고 싶지 않아도 돌아서야 할 시점
눈물이듯 한잎 한잎 추억을 떨구며
힘겹게 건너온 세월 추춤 서서 뒤돌아본다. --- 이차남 [만추의 뜨락] 첫 수

이 시조는 행의 자유화가 안 된 것이 백 번 잘 된 일이지만, 도대체 개성미가 없다. 별스럽지 않은 산문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종장은 '(나는) 힘겹게 건너온 세월(을) 추줌 서서 뒤돌아본
다' 라는 산문을 주어와 조사를 생략하고 행을 구분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찌 시의 일부란 말인가. 이는 행
의 자유화나 전통적 구성이라는 차원 이전의 문제이다.
행과 연을 자유롭게 구성하되 그 이치를 알고 구조미를 활용하는 모범적인 시인이 있다.
 
인간사 다한 날에
뫼 산 자 봇짐 싸고

청송에 푸르른 꿈
묻어 놓고 가려노니

학이여
悠久한 날에
내 꿈 품지
말아라  ---장지성, [학]

 이 시조는 3 장을 각각 한 연으로 구분한 필연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장 사이에 의미의 비상
이 확연하기 때문이다. 초장에서 묘지는 인생의 마지막 봇짐으로 본 것은 무욕의 허무감이다. 그런 감정
과 중장의 "푸르른 꿈"은 아주 대조적이다. 그러니 당연히 연을 구분해야 된다. 종장에 갑자기 학이 등장
하니, 그 앞에 연을 구분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시상 전개의 상황에 맞추어 연을 적절하게 구분하여
행을 자유화했다. 이상 현대시조가 행과 연을 자유화하는 것이 그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살
펴보았다.


4. 휘갑하면
시조가 자유시와 경쟁하기 위하여 무조건 산문시화 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설시조에
경도되는 경향이다. 이는 시조의 특징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정치한 언어 구사에 자신 없어
단시조를 잘 쓸 수 없는 사람들이나 할 짓이다. 단시조는 잘 못 쓰면서 시조단의 주권을 잡기 위해 할 수
있는 고도의 은밀한 전략의 하나가 사설시조를 유행시키는 일이다. 이 작전에 휘말려 사설시조가 판을 치
게 된다면, 시조의 앞날은 참으로 암담할 뿐이다. 나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확신하며, 현대시조의
변화 추이에 관련하여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싶다.
인구에 회자되는 현대 명시(자유시)는 대다수 시조적 가락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지훈의 [낙화1, 2],
[산방], [승무]와 목월의 [나그네], [청노루], [윤사월], [산도화], [모란여정], [불국사]와 미당의 [문둥
이], [푸르른 날], [歸蜀途], [국화옆에서], [학], [행진곡], [三更], [映山紅],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와
신석정의 [님께서 부르시면] 청마의 [그리움] 등이다. 여기서 우리는 4음보율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된
다.
현대시조는 형식이나 내용적으로 변한 점이 많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구수율이나 자수율에서 음보율로
형식이 바뀐 점이다. 현대시조가 고시조보다 더 철저하게 4음보율을 지키고 있다. 고시조는 중장이 3음보이
거나 아니면 종장이 5음보인 경우가 적지 않은 데 비해, 현대시조는 3장 4음보율을 지키고 있다. 비록 행의
자유화가 이루어졌지만 4음보율은 더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그만큼 구수율이나 자수율에서 음보율로 시
조인들의 형식관이 바뀐 것이다. 이것이 시조 창작의 현실이다. 
그런데 아직도 시조는 구수 단위로 의미나 이미지가 전개되어야 한다는 고루한 주장이 있다. 이는 고시조
에서도 엄격히 지켜지지 않았다. 이는 분명 구수율을 맹신하는 시대 착오적 오류요, 시조 현실과 동떨어진
과거 지향적인 논리도 당연히 사라져야 할 주장이다.
문제는 자수율의 잔재이다. 전체 자수에 45자(오차 범위 5자)에 대한 집착은 미미해졌는데, 종장 자수율
(종장 첫 음보 3 자와 둘째 음보는 5 자 이상)을 지키는 문제이다. 이 종장율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
장하는 원로 시조인이 많다. 그 존속 여부는 시조인 다수의 의지에 달렸다.
시조는 원래 융통성이 많이 허용되는 정형시였다. 음보 또한 자의성이 개입될 가능성이 많다. 융통성과
자의성이라는 양자의 공통점 때문인지, 현대시조에  3장 4음보율이 잘 지켜지고 있다. 이를 계승하면서 그
내용의 성격에 따라 단시조나 연시조를 고루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시상의 전개에 맞추어 행 배열
을 자유화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현대시조도 시대에 따라 변해야 발전하지 그렇지 않으면 도태된다. 변하려면 의미적 구수율이나 자수율의
잔재에 얽매이지 않고 형식에 대해 좀 더 유통성을 가져야 된다. 그런 시조인이 점차 많아지면 시조가 독자
층에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 독자층의 지지와 사랑을 받지 않으면 어떤 문학도 결코 발전할 수 없다.
독자가 많아지면 시조 지망 젊은이도 많아지고 독자도 또한 젊어진다. 젊은층의 사랑을 받아야 그 문학의
미래가 밝아진다. 그래야 현대시조가 새롭게 발전하는 시조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릴 것이다. 끝


출처 : 비사벌로 가는 길
글쓴이 : 배성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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