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가 (怨歌)
[원문]
物叱好支栢史(물질호지백사)
秋察尸不冬爾屋支墮米(추찰시부동이옥지타미)
汝於多支行齊敎因隱(여어다복행제교인은)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앙돈은면의개의사호은동의야)
月羅理影支古理因淵之叱(월라리영지리인연지질)
行尸浪阿叱沙矣以支如支(행시랑아질사의이지여지)
貌史沙叱望阿乃(모사사질망아내)
世理都之叱逸烏隱第也(세리도지질일오은제야)
後句亡(후구망)
[해석]
物叱 : 갓- 묻
好支 : 됴히- 줄기
栢史 : 잣이- 자시
秋察尸 : 가슬- 가잘
不冬 : 안들- 안달
爾屋支 : 이우리- 니르기
墮米 : 디매- 디며
汝於多支 : 너어다기- 너엇디
行齊 : 니져- 녀제
敎因隱 : 이신- 잇은
仰頓隱 : 울월던- 우럴던
面矣 : 낟아- 낯이
改衣賜乎隱 : 고치샤온- 개이사온
冬矣也 : 겨울여- 겨슬이여
月羅理 : 달- 다라리
影支 : 그림자- 그르기
古理因 : 고인- 녜리인
淵之叱 : 못을- 모샛
行尸 : 녈- 닐히
浪阿叱 : 믓결- 물앗
沙矣 : 사이- 모래에
以支如支 : 머물러- 이런여런
貌史沙叱 : 짓을사- 즛샛
望阿乃 : 바라나- 바라내
世理都 : 누리- 누리도
之叱 : 짓- 이럿
逸烏隱第也 : 을온듸여- 일온데야
(後句亡)
[현대어 풀이]
한창 무성한 잣이
가을에 아니 이울어지매
너를 어찌 잊어하시던
우럴던 얼굴이 계시온데
달 그림자가 옛 못의
가는 물결 원망하듯
모습이야 바라보나
누리도 싫은지고
(후구는 없어짐)
뜰의 잣나무가
가을도 아닌데 이울어지니
너 어찌 잊어버리신가
우러럽던 낯이 계시온데
달그림자 깃든 못에
가는 물결 머물 듯이
존안을 바라보나
세상도 야속한 즈임이여
(후구는 없어짐)
[작품 개괄]
지은이 : 신충(信忠 ?-?) 효성왕이 잠저(潛邸) 때 자기를 중용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므로 “원가(怨歌)”를 지어 항의하자 왕이 뉘우쳐 작록(爵祿)을 내렸다. 739년(효성왕 3)
이찬 중시(伊中侍), 757년 상대등(上大等)에 승진하였다. 763년(경덕왕 22) 벼슬에서 은퇴
하고, 승려가 되어 단속사(斷俗寺)를 건립하였다.
연대 : 신라(新羅) 제34대 효성왕(孝成王 : 737∼742년) 원년(737년)이나 2년(738년)
갈래 : 향가
형식 : 원래는 10구체 형식이었으나 현재는 후구(後句)가 없는 8구체로 전함
성격 : 주술적. 연군가
의의 : 약속을 잊은 임금을 원망하며 부른 노래
주제 : 약속을 잊은 왕을 원망함
출처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卷五) 신충괘관조(信忠掛冠條)에 설화(說話)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특징]
(1) 문어체(文語體)의 향가(鄕歌)이다.
(2) 10구체(句體)로 되어 있으나, 앞의 8구만 전하고 뒤의 2구는 상실되었다.
(3) 창작연대에 대하여 효성왕설이 지배적 견해이나 제 35대 경덕왕설(景德王 : 742∼765
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4) 작품 전체에 왕의 약속 위반에 대한 원망과 그로 인한 좌절·절망의 심경이 분출되어 있
는데, 이에 대한 해석으로는 주술적 내용의 노래로 보는 견해 이외에 자신의 처지를 자위하
기 위한 노래로 보는 견해, 임금에 대한 충정을 드러낸 노래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그리
고 문학사적으로 연군류(戀君類) 시가의 현존 첫 작품이라는 주장과 주술이 보편적 이념을
추구하는 데에 쓰이지 않고 개인적 영달의 수단으로 변질된 노래라는 주장이 있다.
(5) 주술적인 힘을 가진 노래로서 혜성가(彗星歌)와 같은 계열에 속하지만 노래 자체에는
주술적 요소가 나타나 있지 않고 서정시적인 정조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6) 감정을 표출하는 소재로 잣·물·달이 선택된 것은 찬기파랑가(讚耆婆郎歌)와 동일하지만
그것들이 단지 개인 서정의 비유로 쓰여 감정을 차원 높게 승화하지 못함으로써 원형상징
(原型象徵)으로 쓰인 찬기파랑가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견해가 있다.
(7)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충, 김옹, 이순이 약속하여 입산한 일이 없고, 오직 이순만
이 삭발하고 중이 되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단속사는 이순이 지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8) 원문의 변석(辨釋)에 다소 차이를 보인다.
[배경설화]
신라 효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어느 날,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더불어 대궐
뜰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다가 신충에게 말했다.
"뒷날에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로 남으리라."
신충은 감격하여 일어나서 절을 하였다. 몇 달 후에 효성왕이 즉위하여 공이 있는 신하들에
게 상을 주면서 신충의 일은 까맣게 잊고서 등용시키지 않았다. 신충은 왕을 원망하며 노래
를 지어서 그 잣나무에 붙였다. 그러자 갑자기 잣나무가 시들고 말았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신하가 잣나무에 붙어 있는 그 노래를 왕에게 전달
하니 왕은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정무(政務)가 번잡하여 하마터면 충신을 잊을 뻔했구나!"
이에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그제야 잣나무도 되살아났다. 이로써 신충은 효성과 경덕 왕
조에 걸쳐서 그 총애가 두터웠다.
경덕왕(효성왕의 아우) 22년 계묘에 신충이 두 친구와 약속하고 벼슬을 그만두고 남악으로
들어가 두 번씩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깎고 불도를 닦는 사람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산에 숨어 대왕에게 복을 바치겠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영정이 금당 뒷벽에 있다. 남쪽에 속휴라는 마을이 있는데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삼화상전
에 보면 신충의 봉성사가 있는데 여기와는 서로 틀린다. 그러나 신문왕 때와 계산하면 경덕
왕과는 이미 백여 년의 거리가 있다. 하물며 신문왕과 신충이 과거세의 인연이 있다 함은
이 신충이 아닌 것이 분명하니 마땅히 잘 알아 밝혀야겠다.)라 한다. 또 딴 기록에는, 경덕
왕 때에 직장 이준(고승전에는 이순이라 했다)이 일찍부터 발원하여 나이 50이 되자 마침내
출가하여 절을 지었다. 천보 7년 무자에 나이 50이었다. 조연의 작은 절을 고쳐 큰 절로 만
들어 단속사라 하고 자신도 삭발하고 법명을 공광장로라 하였다. 절에 살기 20년 만에 죽었
다 하니 삼국사의 기록과는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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