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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魂(몽혼) - 꿈속의 넋
- 이옥봉(李玉峰)
近來安否問如何 요사이 안부를 묻노니 근래안부문여하 어떠하시나요?
月到紗窓妾恨多 달 비친 사창(紗窓)에 월도사창접한다 저의 한이 많습니다.
若使夢魂行有跡 꿈 속의 넋에게 약사몽혼행유적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門前石路半成沙 문 앞의 돌길이 문전석로반성사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걸.
<해설>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는 연모의 정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감성인 것이다. 이 시는 이러한 사무치는 연모의 정을 그려내고 있다.
승구(承句)에서는 그리움을 달빛에 비추어 하소연하였고, 결구(結句)에서는 꿈 속의 발자취가 현실로 옮겨진다면 돌길이 반쯤 모래가 되었으리라 하여 임을 만나고 싶은 애타는 심정을 하소연하였다. 전구(轉句)에서의 시상 변환이 특히 뛰어나다. (옥봉집(玉峰集)에서) 임제(林悌, 1549-1587, 백호, 겸재)
본관 나주. 조선 선조 때 시인
1575년 탕음부(蕩陰賦)와 유독시(留犢詩)로 진사 3등급에, 1576년에 대과 급제
아부하지 않는 천성으로 인해 벼슬운은 없었으나 당파 싸움을 개탄, 명산을 찾아 시문을 즐기며 호방하게 즐기다 37세에 요절함
문집 : '백호집', '수성지(愁城誌)',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花史' 등 시조 : '북천이 맑다거늘 우장 없이 길을 가니' '언어유희',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유적지-백호 임제선생시비 묘(전남 나주시)
도 중(途中)
- 김시습(金時習) : 민병수 옮김
貊國初飛雪 春城木葉疏 맥의 나라 이 땅에 첫눈이 날리니, 맥국초비설 춘성목엽소 춘성에 나뭇잎이 듬성해지네.
秋深村有酒 客久食無魚 가을 깊어 마을에 술이 있는데, 추심촌유주 객구식무어 객창에 오랫동안 고기 맛을 못보겠네. 山遠天垂野 江遙地接虛 산이 멀어 하늘은 들에 드리웠고, 산원천수야 강요지접허 강물 아득해 대지는 허공에 붙었네.
孤鴻落日外 征馬政躊躇 외로운 기러기 지는 해 밖으로 날아가니, 고홍락일외 정마정주저 나그네 발걸음 가는 길 머뭇거리네.
<해설>
이 작품은 늦가을의 산촌 풍경과 함께 유랑의 길을 떠도는 시인의 감회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전통적인 한시의 형태인 5언 율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시적 감흥을 돋구는 부분은 후반부이다.
먼 산과 아득한 강물, 들판과 허공이 서로 대조를 보이는 가운데, 석양의 기러기와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심정을 대비시켜 놓고 있다.
시적 대상을 적절하게 선택하고 선명한 이미지의 대조를 통해 그것을 구체화시키고 있으며, 서정적 자아의 형상이 외로운 나그네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매월당집(梅月堂集)에서)
김시습 金時習 (1435~1493)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 : 강릉(江陵) 자 : 열경(悅卿). 호 :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 별칭 : 법호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출생지 : 서울 주요저서 : '오뇌의 무도', '해파리의 노래', '꽃다발', '망우초' '금오신화', '남염부주지', '만복사저포기', '매월당집'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 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에게 불려가 총애를 듬뿍 받았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1463년(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보천탄에서(寶泉灘卽事)
- 김종직(金宗直)
桃花浪高幾尺許 복사꽃 뜬 냇물 도화랑고기척허 얼마나 불었는고,
?石沒頂不知處 솟은 바위 아주 묻혀 ?석몰정부지처 짐작 어려워.
兩兩로玆鳥失舊磯 쌍쌍의 가마우지 양양로자조실구기 옛 터전 잃어,
啣魚却八菰蒲去 물고기 입에 문 채 함어각팔고포거 풀섶에 드네.
<해설>
이 작품은 「보천탄에서」 2수 중 첫째 수로 7언 절구이다. 기(起), 승(承)에서 비바람에 복사꽃이 떨어지고 냇물이 불어, 솟은 바위가 잠기고 말았다고 하여 냇물이 불었다는 상황의 변화를 부각시켜 놓고,
전구(轉句)에 와서 쌍쌍의 가마우지가 불어나는 냇물 때문에 터전을 잃었다고 했다. 그런데 결구(結句)에서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입에 문 채 풀섶에 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냇물이 불어 옛 터전을 잃었다고 해서 삶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시류(時流)에 따라 살 수도 없는 가마우지의 그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역사를 인고(忍苦)하며 살아가는 곧은 정신을 볼 수 있다. ('점필재집(焰畢齋集)'에서) 김종직 金宗直 (1431~1492)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 문신. 본관 : 선산 호 : 점필재 별칭 : 자 계온, 효관, 시호 문충 활동분야 : 정치, 학문 출생지 : 경남 밀양 주요저서 : '유두유록', '청구풍아', '당후일기'
1453년(단종1)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 교리(校理), 감찰(監察)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냈다.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도승지, 이조참판,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한성부윤,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 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이미 죽은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등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米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고,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일선지(一善誌)', '이준록(彛尊錄) 등이 있다.
전가(田家)
- 강희맹(姜希孟)
流水涓涓泥沒蹄 흐르는 물 졸졸, 류수연연니몰제 진흙에 빠지고
煖烟桑枯懿鳩啼 따뜻한 날 뽕나무에 난연상고의구제 비둘기 앉아 우네
阿翁解事阿童健 늙은이는 일을 알고 아옹해사아동건 아이는 씩씩하여
?竹通泉過岩酉 홈통에 물을 보내 ?죽통천과암유 언덕을 넘어 가네.
<해설>
이 작품은 농촌의 건강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질척거리는 논, 논 옆의 뽕나무밭에서 비둘기의 평화로운 지저귐, 제 때에 할 일을 하는 농부와 그 뒤를 따르는 씩씩한 농촌 아이 등이 시의 소재이다. 한 편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풍속을 경계하고 말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 소중하다.'는 작자의 말대로, 농사의 때를 놓치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는 농부가 되어 신선한 삶을 체험하고 있다. ('촌담해이(村談解滯)' 에서) 강희맹 姜希孟 (1424~148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 진주 호 : 사숙재, 운송거사, 국오, 만송강 별칭 : 자 경순 세종의 이질(姨姪)이고, 화가 희안(希顔)의 동생이다.
주요저서 : '금양잡록(衿陽雜錄)', 촌담해이(村談解燎) 등
1447년(세종 29)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종부시주부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450년 예조좌랑에 이어 돈령부판관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되었으며, 1455년(세조 1)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세조로 등극하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1463년 중추원부사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464년 부윤으로 어제구현재시(御製求賢才試)에서 차석,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서 3등, 등준시(登俊試)에서 차석을 차지하였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되었으며, 예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1468년(예종 1) 남이(南怡)의 옥사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으로 진산군(晉山君)에 책봉되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봉되고, 지춘추관사로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 '예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이어 돈령부판사, 우찬성 등을 거쳐 1482년 좌찬성에 이르렀다.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로서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맡은 일은 완벽하게 처리하면서도 겸손하여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관인적 취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농촌사회에서 널리 전승되고 있던 민요나 설화에도 남다른 식견으로 관인문학(官人文學)의 틀을 스스로 깨뜨려 버리는 면도 있었다. 이런 예는 당시 농정의 실상과 농민들의 애환을 노래한 '농구십사장(農謳十四章)'에 잘 나타나 있다.
독서유감(讀書有感)
- 서경덕 讀書當日志經綸 독서하든 당년에 독서당일지경륜 경륜에 뜻하였더니
歲暮還甘顔氏貧 만년에 안빈낙도 세모환감안씨빈 오히려 달갑구나.
富貴有爭難下手 부귀엔 시샘 많아 부귀유쟁난하수 손대기 어려웠고
林泉無禁可安身 임천엔 금함 없어 임천무금가안신 심신이 편안하였네.
採山釣水堪充腹 채산 조수하여 채산조수감충복 배를 채우고
月吟風足暢神 음풍 영월로 월음풍족창신 마음을 풀었네.
學到不疑知快闊 학문이란 학도불의지쾌활 의혹 없어야 상쾌하나니 免敎虛作百年人 평생의 허랑함을 면교허작백년인 면케 할 수 있네.
<해설>
이 작품은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책을 읽는 선비의 심회를 읊었다.
1-2행 원문에는 '안씨빈(顔氏貧)'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안빈 낙도'라고 의역하였다. 안씨는 자(字)가 자연(子淵)이어서 안 연(顔淵)이라고도 부르며 공자의 수제자 였다. 그는 가난한 가운데서도 도를 즐기고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읊은 것이다. 3-4행 부귀를 버리고 자연 속에서 즐기는 생활을 나타낸 것이다. 5-6행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족 자락(自足自樂)하는 생활을 보여 주고 있다. 7-8행 원문의 '백년인(百年人)'은 보통 사람의 일생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의 명성이나 학문이 자기의 일생에만 국한되고 마는 사람을 백년인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작자는 학문하여 도통(道通)의 경지에 이르러 격물치지(格物致知)하게 되었음을 은근히 시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대 : 중종 때 작자 : 서경덕(徐敬德) 형식 : 칠언 율시(七言律詩) 압운 : 평성 '眞'의 운통인 綸, 貧, 身, 神, 人 주제 : 학문하는 자세
서경덕 徐敬德 (1489~1546) 조선 중기의 유학자,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 본관 : 당성(唐城) 호 : 화담(花潭), 복재(復齋) 별칭 : 시호 문강(文康). 주요저서 : '화담집(花潭集)'
화담은 그가 송도의 화담에 거주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여 부른 것이다. 가세가 빈약하여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고, 주로 산림에 은거하면서 문인을 양성하였으며,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조식(曺植), 성운(成運) 등 당대의 처사(處士) 들과 지리산, 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으며, 1544년 김안국(金安國)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천거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학문경향은 궁리(窮理)와 격치(格致)를 중시하였으며, 선유의 학설을 널리 흡수하고 자신의 견해는 간략히 개진하였다. 또한 주돈이(周敦燎), 소옹(邵雍), 장재(張載) 등 북송(北宋) 성리학자의 학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단편 논저로는 '원리설(原理說)',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 네 편이 있는데, 이들 논저에는 이(理)'보다는 '기(氣)'를 중시하는 주기철학의 입장이 정리되어 있다.
'태허설'에서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태허 또는 선천(先天)이라 하고 태허에서 생성 발전된 만상(萬象)을 후천(後天)이라 하였으며, '귀신사생론'에서는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死生一如)를 주장하여 기의 불멸성을 강조하고, 불교의 인간 생명이 적멸한다는 논리를 배격하였다.
대표적 문인으로는 허엽(許曄), 박순(朴淳), 민순(閔純), 박지화(朴枝華) 서기(徐起), 한백겸(韓百謙), 이지함(李之函) 등이 있으며, 그의 학문은 남북분당기에 북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개성을 대표한 송도3절(松都三絶)로 지칭되기도 하며,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는 시조작품으로도 전해질 만큼 유명하다.
노장사상으로 대표되는 도가사상(道家思想)에도 관심을 보여 도가의 행적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그의 도가적인 성향이 소개되었다. 그의 학풍은 조선 전기의 사상계의 흐름이 주자성리학 일색만이 아니었던 분위기를 보여주며,
그의 문인들 중에서 양명학자나 노장사상에 경도된 인물이 나타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의 주기철학을 유물론의 원류로 평가하여 그의 철학을 높이 평가한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과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晩步 늦을 녘에 거닐면서
- 이 황(李滉)
苦忘亂抽書 잊음 많아 고망란추서 이 책 저 책 뽑아 놓고서 散漫還復整 흩어진 걸 산만환복정 도로 다 정리하자니,
曜靈忽西頹 해가 문득 요령홀서퇴 서으로 기울어지고, 江光搖林影 가람엔 강광요림영 숲 그림자 흔들리누나.
扶?下中庭 막대 짚고 부?하중정 뜨락으로 내려를 가서 嬌首望雲嶺 고개 들고 교수망운령 구름재를 바라다보니,
漠漠炊烟生 아득아득 막막취연생 밥 짓는 연기가 일고, 蕭蕭原野冷 으스스 소소원야냉 산과 벌은 싸늘하구나.
田家近秋穫 농삿집 가을걷이 전가근추획 가까워지니, 喜色洞臼井 방앗간 우물터에 희색동구정 기쁜 빛 돌아.
鴉還天機熟 갈가마귀 날아드니 아환천기숙 절기 익었고, 鷺立風標? 해오라비 우뚝 서니 로립풍표? 모습 훤칠해.
我生獨何爲 내 인생은 홀로 아생독하위 무얼 하는 건지 원. 宿願久相梗 숙원이 오래도록 숙원구상편 풀리질 않네.
無人語此懷 이 회포를 무인어차회 뉘에게 얘기할거나. 搖琴彈夜靜 거문고만 둥둥 탄다, 요금탄야정 고요한 밤에.
<해설>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을 먼저 떠올려 보자. 해는 지고 멀리 저녁이 오고 있다. 하루의 끝을 알리는 시간이다. 그리고 눈을 멀리 들로 돌리니 가을걷이가 가까워져 무르익은 들녘이 보인다. 한 해의 끝을 알리는 시간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 오른다. 또, 방앗간이며 우물터에서는 사람들이 수확의 기쁨에 들떠 있다. 모든 것이 성취의 기쁨을 맛보는 시간이다.
밥 짓는 연기며 방앗간 우물터의 기쁜 빛이 그런 뜻을 함축한다. 그래서 날아드는 갈가마귀며 우뚝 선 해오라비까지도 다 기쁨과 자랑에 차 있다.
이런 가운데 나만 오로지 이룬 것이 없다. 책을 뽑아 놓고 흩어진 걸 정리하면서 그 공허함이 새삼 뼈에 사무친다. 숙원을 가진 지 오래지만, 하루 일이나 농사일 같은 소득이 없다.
그 말을 누구에게 할 수 있으랴, 거문고만 탈 뿐이다. 이처럼 바라보는 사물과 대비되는 나를 발견하면서 숙연한 고요에 잠기는 정서가 깃들여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문학이 대상으로부터 '나'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공부한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황 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본관 : 진보(眞寶) 호 :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별칭 :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시호 문순(文純) 활동분야 : 철학, 정치 출생지 : 경북 예안(禮安) 주요저서 : '퇴계전서(退溪全書)' : 修正天命圖說, 聖學十圖, 自省錄 朱書記疑, 心經釋疑, 宋季之明理學通錄, 古鏡重磨方, 朱子書節要, 理學通錄, 啓蒙傳疑, 經書釋義, 喪禮問答, 戊辰封事, 退溪書節要 四七續編 주요작품 :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퇴계필적(退溪筆迹)'
12세 때 숙부 이우(李艇)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 박사(博士), 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1539년 수찬(修撰), 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15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 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 1554년 형조, 병조의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선조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 기(氣) 이원(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규 원(閨怨)
- 임 제(林悌)
十五越溪女 羞人無語別 열다섯 살의 아리따운 아가씨 십오월계녀 수인무어별 사람이 부끄러워 말도 못 하고 이별했네.
歸來掩重門 泣向梨花月 돌아와 겹문을 닫아 걸고는 귀래엄중문 읍향리화월 배꽃처럼 하얀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해설>
임제는 송순(宋純), 정철(鄭澈) 등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風靡)했던 풍류 남아요, 재사(才士)였다. 그는 '수성지(愁城誌)'라는 뛰어난 소설을 썼을 뿐만 아니라 시조의 작가로도 탁월한 재주를 보였고, 한시의 창작에서도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
이 작품에서 보듯 작가는 여성적인 섬세한 감각으로 이별당한 여인의 슬픔을 효과적으로 포착해 내고 있다. 사랑하는 임과 헤어지면서도 남이 부끄러워 이별의 말 한 마디 못하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
이 작품에서 배꽃처럼 흰 달(梨花月)은 이 작품의 배경의 구실을 하면서 동시에 임의 모습을 더욱 생각나게 하는, 그래서 작중 화자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하는 작품 내적 기능을 하는 소재이다.
임제 林悌 [1549~1587] 조선 중기의 시인, 문신. 본관 : 나주 호 : 백호(白湖), 겸재(謙齋) 별칭 : 자 자순(子順) 주요저서 : '화사(花史)', '수성지(愁城誌)' '임백호집(林白湖集)', '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
대곡(大谷) 성운(成運)의 문인. 1576년(선조 9)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에 급제, 157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다. 예조정랑(禮曹正郞)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내다가 동서(東西)의 당파싸움을 개탄,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보냈다.
당대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시풍(詩風)이 호방하고 명쾌했다. 황진이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와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한 시조 '한우가(寒雨歌)'가 유명하다.
강상문가(江上聞歌)
- 이안눌(李安訥)
江頭誰唱美人辭 강가에서 그 누가 미인사를 부르네 강두수창미인사 正是孤舟月落時 바로 지금 외로운 배에 달이 질 무렵에 정시고주월락시 ?璥戀君無限意 슬프도다 연군의 무한한 정을 ?경련군무한의 世間唯有女郞知 세상에서 아는 것은 오직 기생뿐이어라. 세간유유녀랑지
<해설>
이 작품은 강 위에서 여인이 부르는 송강(松江)의 미인곡을 듣고, 인걸은 가고 노래만 남은 인생 무상의 회포를 읊은 시이다. ('성수시화(惺未詩話)'에서)
대관령을 넘으면서
-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
鶴髮慈親在臨瀛 늙으신 어머님을 학발자친재림영 강릉에 두고 身向獨去長安情 이 몸 혼자 서울로 신향독거장안정 떠나는 마음
回首北坪時一望 돌아보니 고향은 회수북평시일망 아득도 한데 白雲飛下暮山情 흰 구름 나르고 백운비하모세정 산은 너므네
('선비행장'에서)
<해설>
이 작품은 이율곡의 어머니인 사임당이 늙으신 친정 어머니를 홀로 두고 서울 시댁으로 떠나는 슬픔을 읊은 시이다.
申師任堂 : 1504 ~ 1551.
이름은 인선. 호는 사임당, 임사재.
신사임당은 1504년(연산군10)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신명화의 딸로 태어났다.
신사임당은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유교의 경전과 좋은 책들을 많이 읽었고, 시와 그림에도 빼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그림 솜씨는 대단하여 7세 때 안견의 그림을 보고 똑같이 그렸을 정도였다. 이후 안견의 화풍에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정교함을 더한 신사임당은 조선 최고의 여류 화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산수화와 풀, 벌레, 포도 등을 그리는데에도 독특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신사임당은 한시에도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이원수를 따라 시댁인 한양으로 오는길에 대관령에서 친정을 바라보며 지은 '유대관령망친정'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사친' 등은 매우 훌륭하다.
신사임당은 19세에 이원수와 결혼하였다. 이때 학문을 열심히 닦기로 약속하고 떠난 남편 이원수가 아내 신사임당을 그리워하여 밤중에 돌아오자 되돌려 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남편 이원수가 당숙인 우의정 이기의 집을 드나들자 이를 말렸다. 그것은 이기가 1545년(인종1) 윤원형과 함께 당파 싸움을 일으켜 죄없는 많은 선비를을 모함하여 죽였기 때문이다.
이원수는 이러한 신사임당의 말을 받아 들여 뒷날 당파 싸움의 화를 당하지 않았다. 신사임당은 그저 평범한 아내가 아니라, 남편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강인한 품성을 지닌 아내였다.
신사임당은 네 아들과 세 딸을 낳아 사랑으로 키웠다. 신사임당은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을 갖도록 엄격하게 교육을 시켰는데, 신사임당의 자애로운 성품과 행실을 이어받아 일곱 남매는 저마다 훌륭하게 자랐다. 그 가운데에서도 율곡 이이의 인품과 학문은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1551년 신사임당은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신사임당은 뛰어난 화가인 동시에 높은 덕과 인격을 쌓은 어진 부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곱 남매를 키운 훌륭한 어머니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덕목을 갖춘 신사임당은 우리 나라 여성의 모범이 되고 있다.
신사임당이 그린 그림으로는 '산수도', '자라도, '초충도' 등이 유명하다.
. 불일암 인운 스님에게(佛日庵贈因雲釋)
- 이달 寺在白雲中 절집이라 사재백운중 구름에 묻혀 살기로, 白雲僧不掃 구름이라 백운승불귀 스님은 쓸지를 않아. 客來門始開 바깥 손 와서야 객래문시개 문 열어 보니, 萬壑松花老 온 산의 송화꽃 만학송화로 하마 쇠었네.
<해설>
자연에 묻혀 속세를 멀리하고 세월의 흐름도 잊은 채 살아가는 삶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기(起) 절이 흰 구름 속에 파묻혀 있다.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산사(山寺)의 정경인 동시에 속세와 단절이란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다.
승(承)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길을 쓸 이유가 없다. 속세와 떨어진 절간에서 느끼는 유연한 정서를 표현한 부분으로, 쓸려는 것이 구름이라는 데 묘미가 있다.
전(轉). 결(結) 길손이 찾아와 비로소 문을 여니 온 골짜기에 송화꽃이 이미 피어 있다. 시간의 흐름, 또는 계절의 변화도 초월한 채, 자연과 함께 지내는 경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
연대 : 명종-선조 작자 : 이달(李達) 형식 : 오언 절구(五言絶句) 주제 : 자연 속에서 느끼는 한적한 정취 출전 : 손곡집(孫谷集) 지은이 : 이달(李達 ; 조선 선조대)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 문장과 시에 능했다. 최경창, 백광훈과 함깨 삼당시인이라 불렸으며,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이기도 하다. 특히 허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곡자(哭子) - 허난설헌
去年喪愛女 지난 해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거년상애녀 今年喪愛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금년상애자 哀哀廣陵土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애애광릉토 雙墳相對起 두 무덤이 마주 보고 있구나. 쌍분상대기 蕭蕭白楊風 백양나무에는 으스스 바람이 일어나고 소소백양풍 鬼火明松楸 도깨비불은 숲속에서 번쩍인다. 귀화명송추 紙錢招汝魂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지전초여혼 玄酒存汝丘 너희 무덤에 술잔을 따르네. 현주존여구 應知第兄魂 아아, 너희들 남매의 혼은 응지제형혼 夜夜相追遊 밤마다 정겹게 어울려 놀으리 야야상추유 縱有服中孩 비롯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종유복중해 安可糞長成 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라리오. 안가분장성 浪吟黃坮詞 황대노래를 부질없이 부르며 낭음황대사 血泣悲呑聲 피눈물로 울다가 목이 메이도다. 혈읍비탄성
<해설>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드러낸 한시이다. 자식을 생각하는 모정의 피눈물은 듣고 보는 듣하다.
형식 : 오언절구 주제 : 일자식을 잃은 슬픔 출전 : '난설헌집' 참고 : 古詩(古體詩) , 近體詩(근체시)
빈녀음(貧女吟)
- 허난설헌 手把金剪刀 싹뚝싹뚝 가위로 옷을 마르노라면 수파금전도 夜寒十指直 추운 밤에 열 손가록 곱아온다네. 야한십지직 爲人作嫁衣 남의 시집갈 옷 만들고 있지만 위인작가의 年年還獨宿 나는야 해마다 홀로 자누나. 년년환독숙
<해설>
이 작품은 가난한 여자의 처지를 읊은 노래로 모두 네 수인데, 수록된 부분은 네 번째 것이다. 가난하니 길쌈하고 바느질해서 살아야 하고, 시집 갈 날은 멀어지기만 한다는 내용으로 자신의 소망은 가슴 속에 묻어둔 채 남의 일에 봉사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불공평(不公平)한 현실을 은근히 고발한 작품이다.
연대 : 선조 작자 : 허난설헌(許蘭雪軒) 형식 : 오언 절구(五言絶句) 제재 : 길쌈옷 주제 : 가난한 여인의 처지(시집 못가는 한) 출전 : 난설헌집(蘭雪軒集)
'허난설헌 한시 대다수는 표절이다.' - 박현규 교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누나요 한국문학사 제일의 천재 여류시인이라는 허난설헌(1563~1589)의 한시(漢詩) 중 상당수가 중국 시를 베끼거나 베낀 흔적이 역력하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가 나왔다.
사실 허난설헌 작품이 표절이라는 지적은 이미 그녀와 같은 해 태어난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공식 제기한 것을 비롯해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끊이지 않았으나 몇몇 작품 위주였고 종합적인 고찰은 없었다.
더구나 허난설헌이라는 이름이 한국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우뚝해서인지 현대 한국한문학계에서는 표절 문제를 고의로 피해갔다.
하지만 중문학 및 한중 문화교류사 전공인 순천향대 중어중문학과 박현규(42) 교수가 현존하는 허난설헌 작품을 종합 분석한 결과 절반 이상이 중국 한시를 베끼다시피 한 표절임을 밝혀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먼저 허난설헌 한시들을 청나라 강희제의 명으로 전체 당나라 시작품을 모은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중국 시들과 비교했다.
박 교수는 허난설헌 작품이 표절이다 아니다 하는 판단 근거를 '다른 시에서 절반 혹은 그 이상을 베꼈을 경우'로 설정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조사대상 작품 중 대다수가 중국시에서 베껴왔거나 그런 흔적이 농후한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대표적인 표절의 실례로 10개를 들었다.
'축성원'(築城怨)이란 작품은 백거이와 쌍벽을 이뤘던 원진(元桭)이라는 중국시인의 '고축성곡'(古築城曲)을 한 글자만 빼놓고 그대로 베꼈으며 '가객사'(賈客詞)는 양릉(楊凌)의 '가객수'(賈客愁)를 몇 글자만 고쳤다.
또 '빈녀음'(貧女吟)은 장벽(張碧)이라는 시인의 '빈녀'(貧女)를 표절했고 '양류지사'(楊柳枝詞)는 당나라 때 이익(李益)이 쓴 '도중기이이'(途中寄李二)와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다.
박 교수는 이들 작품은 누가봐도 표절로 밖에 볼 수 없는 경우이고 다른 허난설헌 작품 곳곳에서도 당시(唐詩)에서 베껴온 구절들이 부지기수에 달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박 교수의 이번 연구결과는 중국 시 중에서도 당시만을 비교한 것이지만 그 범위를 다른 시대로 확대할 경우 더 많은 표절 사례가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중국 사람의 말을 인용해 허난설헌이 8세때 지었다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이 명나라 시를 베낀 것이라고 호된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표절했을까? 허난설헌 자신일 수도 있으나 박 교수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면서도 동생 허균을 지목하고 있다.
박 교수는 '당시 허균과 동일한 시대에 활약한 사람들이 표절 편찬자로 허균을 지목하고 있었고 또 그가 일찍이 중국에 갔다가 위작서를 만들어 조선 조정을 기만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한마디로 현존하는 허난설헌 작품 중에는 표절 흔적이 매우 역력하다는 결과를 얻었으며 이로써 지난날 허난설헌 작품의 표절시비에 대한 논쟁이 종식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탐진 촌요(耽津村謠)
- 정약용
5 水田風起麥波長 무논에 바람 일어 보리이삭 물결친다. 수전풍기맥파장 麥上場時稻揷秧 보리타작 하고 나면 모내기 제 철이라 맥상장시도삽앙 某菜雪无新葉綠 눈 내리는 하늘 아래 배추 새잎 파아랗고 모채설무신엽록 鷄雛?月嫩毛黃 섣달에 깐 병아리는 노란 털이 어여쁘네. 계추?월눈모황
7 棉布新治雪樣鮮 새로 짜낸 무명이 눈결같이 고왔는데 면포신치설양선 黃頭來博吏房錢 이방 줄 돈이라고 황두가 뺏어가네 황두래박이방전 漏田督稅如星火 누전 세금 독촉이 성화같이 급하구나 루전독세여성화 三月中旬道發船 삼월 중순 세곡선(稅穀船)이 서울로 떠난다고. 삼월중순도발선
<해설>
'탐진 촌요'는 '탐진 농가(耽津農家)', '탐진 어가(耽津漁歌)'와 더불어 3부작(三部作)을 이루고 있다. '탐진 촌요'는 모두 15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 실린 것은그 중 두 수이다.
첫째 수는 계절의 변화에 따른 농촌의 정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보리 이삭 물결치는 이른 봄, 모내기 바쁜 여름철, 눈 맞아 새로 자란 파란 배추 잎, 섣달에 깐 노란 병아리 등 농촌 생활과 직결된 소재들을 동원해 계절의 변화에 따른 정겨운 농촌의 풍경을 눈에 잡힐 듯이 묘사했다. 대상을 바라보는 작자의 시선에는 농촌에 대한 따스한 사랑이 흠뻑 배어 있다.
둘째 수는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눈물 겨운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피땀 흘려 짜낸 무명을 황두들이 뺏어가고, 성화 같은 세금 독촉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삶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이 다가온다. 다산의 한시 가운데는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고달픈 삶을 노래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다산은 이런 작품을 통해 당시의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고발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을 촉구했다.
가마꾼(肩輿歎)
- 정약용(丁若鏞)
人知坐輿樂 사람들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 인지좌여락 不識肩輿苦 가마 메는 괴로움은 모르고 있네 . 불식견여고 肩輿山峻阪 가마 메고 험한 산길 오를 때면, 견여산준판 捷若蹄山? 빠르기가 산 타는 노루와 같고 첩약제산? 肩輿不懸? 가마 메고 비탈길 내려올 때면, 견여불현? 沛如歸笠? 우리로 돌아가는 염소처럼 재빠르네. 패여귀립? 肩輿超稗? 가마 메고 깊은 골짜기 건너갈 때면, 견여초패 松鼠行且舞 다람쥐도 덩달아 같이 춤추네. 송서행차무 側石微低肩 바위 옆을 지날 때에는 어깨 낮추고, 측석미저견 窄徑敏交服 오솔길 지날 때에는 종종걸음 걸어가네. 착경민교복 絶壁採?潭 검푸른 저수지 절벽에서 내려다볼 때는, 절벽채?담 駭魄散不聚 놀라서 혼이 나가 아찔하기만 하네. 해백산불취 快走同履坦 평지를 밟듯이 날쌔게 달려 쾌주동이탄 耳竅生風雨 귀에서 바람 소리 쌩쌩 난다네. 이규생풍우 所以游此山 이 산에 유람하는 까닭인즉슨 소이유차산 此樂必先數 이 즐거움 맨 먼저 손꼽기 때문 차락필선수 紆回得官岾 근근히 관첩(官帖)을 얻어만 와도 우회득관첩 役屬遵遺矩 역속(役屬)들은 법대로 모셔야 하는데 역속준유구 桓爾乘傳赴 하물며 말타고 행차하는 한림(翰林)에게 환이승전부 翰林疇敢侮 누가 감히 못 하겠다 거절하리오. 한림주감모 領吏操鞭? 고을 아전은 채찍 들고 감독을 맡고, 령리조편? 首僧整編部 수승(首僧)은 격식 차려 맞을 준비하네. 수승정편부 迎候不差限 높은 분 영접에 기한을 어길쏘냐, 영후불차한 肅恭行接武 엄숙한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네. 숙공행접무 喘息雜湍瀑 가마꾼 숨소리 폭포 소리에 뒤섞이고 천식잡단폭 ?漿徹襤褸 해진 옷에 땀이 베어 속속들이 젖어 가네 ?장철남루 度虧旁者落 외진 모퉁이 지날 때 옆엣놈 뒤처지고, 도휴방자락 陟險前者垢 험한 곳 오를 때엔 앞엣놈 허리 숙여야 하네. 척험전자구 壓繩肩有瘢 밧줄에 눌리어 어깨에 자국 나고, 압승견유반 觸石?未涯 돌에 채여 부르튼 발 미쳐 낫지 못하네. 촉석?미애 自痔以寧人 자기는 병들면서 남을 편케 해 주니, 자치이영인 職與驢馬伍 하는 일 당나귀와 다를 바 하나 없네. 직여려마오 爾我本同胞 너나 나나 본래는 똑같은 동포이고, 이아본동포 洪勻受乾父 한 하늘 부모삼아 다 같이 생겼는데, 홍균수건부 汝愚甘此卑 너희들 어리석어 이런 천대 감수하니, 여우감차비 吾寧不愧憮 내 어찌 부끄럽고 안타깝지 않을쏘냐. 오녕불괴무 吾無德及汝 나의 덕이 너에게 미친 것 없었는데, 오무덕급여 爾惠胡獨取 내 어찌 너의 은혜 혼자 받으리. 이혜호독취 兄長不憐弟 형이 아우를 사랑치 않으니, 형장불련제 慈衰無乃怒 자애로운 어버이 노하지 않겠는가. 자쇠무내노 僧輩楢?矣 중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요. 승배유?의 哀彼嶺不戶 영하호(嶺下戶) 백성들은 가련하고나. 애피령불호 巨?雙馬轎 큰 깃대 앞세우고 쌍마(雙馬) 수레 타고 오니, 거?쌍마교 服?傾村塢 촌마을 사람들 모조리 동원하네. 복?경촌오 被驅如太鷄 닭처럼 개처럼 내몰고 부리면서, 피구여태계 聲吼甚豺虎 소리치고 꾸중하기 범보다 더 심하네. 성후심시호 乘人古有戒 예로부터 가마 타는 자 지킬 계율 있었는데 승인고유계 此道棄如土 지금은 이 계율 흙같이 버려졌네. 차도기여토 耘者棄其鋤 밭 갈다가 징발되면 호미 내던지고 운자기기서 飯者哺以吐 밥 먹다가 징발되면 먹던 음식 뱉어야 해. 반자포이토 無辜遭嗔? 죄 없이 욕 먹고 꾸중 들으며, 무고조진? 萬死唯首俯 일만 번 죽어도 머리는 조아려야. 만사유수부 ??旣踰艱 병들고 지쳐서 험한 고비 넘기면, ??기유간 噫沓始贖擄 그 때야 비로소 포로 신세 면하지만, 희답시속로 浩然揚傘去 사또는 일산(日傘)쓰고 호연(浩然)히 가버릴 뿐, 호연양산거 片言無慰撫 한 마디 위로의 말 남기지 않네. 편언무위무 力盡近其畝 기진 맥진하여 논밭으로 돌아오면 력진근기무 呻?命如縷 지친 몸 신음 소리 실낱 같은 목숨이네. 신?명여루 欲作肩與圖 이 가마 메는 그림 그려 욕작견여도 歸而獻明主 임금님께 돌아가서 바치고 싶네. 귀이헌명주
<해설>
정약용이 귀양에서 풀려나 향리로 돌아와 있을 때(1832년) 지은 작품으로, 백성들의 삶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함께 풍자성이 강하게 나타나 모순된 시대 현실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적 태도를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다.
작자는 먼저 관리의 가마를 메고 산으로 올라가는 영하호(嶺下戶) 주민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한 후,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 가마 메는 괴로움은 모르는 관리들의 도덕적 무감각을 강하게 질타한다.
이런 비판 속에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부당한 행위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작자의 진보적인 의식이 숨어 있다. 작자는 이러한 논리를 임금에게까지 적용시킨다. 어떤 면에서 보면 임금이야말로 백성들에게 가마 메는 괴로움을 강요하는 가장 핵심적인 주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구우(久雨)
- 정약용(丁若鏞)
窮居罕人事 궁벽하게 사노라니 궁거한인사 사람 보기 드물고 恒日廢衣冠 항상 의관도 항일폐의관 걸치지 않고 있네.
敗屋香娘墜 낡은 집엔 패옥향낭추 향랑각시 떨어져 기어가고, 荒畦腐婢殘 황폐한 들판엔 황휴부비잔 팥꽃이 남아 있네.
睡因多病減 병 많으니 따라서 수인다병감 잠마저 적어지고, 秋賴著書寬 글짓는 일로써 추뢰저서관 수심을 달래 보네.
久雨何須苦 비 오래 온다 해서 구우하수고 어찌 괴로워만 할 것인가 晴時也自歎 날 맑아도 청시야자탄 또 혼자서 탄식할 것을.
<해설>
이 작품은 장마철 농촌의 가난한 삶을 그리고 있다. 벼슬길에서도 멀어져 찾아오는 이도 없고, 의복은 남루한데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집 안에는 노래기가 기어다니고 들판은 황량한 모습이니 글짓는 선비의 마음을 짐작할 만하다. 가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뻔히 알고 있지만 자신에게 힘이 없어 괴로워해야 하는 작자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그러니 차라리 비가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가져 보는 것이다.
창의시(信義誇)
-최익현(崔益鉉 ) 皓首奮較熱(호수투견묘) 백발로 밭이랑에서 분발하는 것은 草野願忠心(초야원충심) 초야의 충심을 바랐음이라.
亂諒人皆討(난적인개토) 난적은 누구나 쳐야 하니, 何須問古今(하수문고금) 고금을 물어서 무엇하리.
<해설>
백발로 ∼ 분발하는 것은 : 나이가 들어 벼슬을 그만두고 초야에 묻혀 사는 이가 농사일에 더욱 힘을 쏟는 이유는
초야의 충심을 바랐음이라. : 비록 몸은 초야에 있을지라도 나라를 아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고금을 물어서 무엇하리. : 세상을 어지럽히는 도적을 치는 것은 누구라도 해야 할 일이므로, 고금의 예를 들어 그 이유를 일일이 밝힐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투쟁 의식이 응축되어 있는 시행이다.
창의 :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 . 호수 : 횐 머리. 백수(白首). 노인을 가리킴 . 견묘 : 밭도랑, 이랑. 전답. 민간(民問) 또는 초야(草野)를 상징함. 초야 : 시골. 난적 : 우리 나라를 침입하는 적. 왜적. 개토 : 모두가 나서서 토벌함.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조선 고종 때의 문신, 학자. 호는 면암(勉壇).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 확동을 전개했으나 체포되어 단식 투쟁 끝에 운명하였다.
구한말에 최익현이 지은 한시이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예를 따르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분연히 일어나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선비 정신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창의시'란 '의병시'를 가리킨다. 항일 의병이 일어나자 의병의 체험을 담은 여러 갈래의 의병 문학이 나타났는데, 그 중에서 한시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의병장의 한시는 한문학의 고답적(高踏的)인 인습적 표현을 버리고 역사적 삶의 경험과 투쟁 의식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특징이 있다.
오언 절구의 한시에는 장쾌한 선비 정신이 드러나 있으며, 의병을 일으켜야 하는 취지가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초야에 묻혀 있는 늙은이지만 늘 충성을 잊지 않는 마음을 간직하고 살았으며, 그러기에 당연히 왜적을 물리치는 일에 나서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표명 (表明)하고 있다.
갈래 :오언 절구(五言絶句) 압운 : 心, 今 성격 : 창의시, 의병시 표현 : 대유법, 설의법 주제 : 창의 출전 : 면암 선생창의전말
절명시(絶命詩) - 황현(黃玹)
鳥獸哀鳴海岳嚬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고 바다 또한 찡그리네 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버렸구나. 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 가을의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을 되새기니 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 어렵구나,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가. 난작인간식자인
<해설>
국권 상실로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지식인의 한계를 절감하여 자결하는 심경을 나타낸 시이다. 조선 선비의 꿋꿋한 기상과 정신이 잘 형상화되었다.
표현 : 활유법, 대유법 성격 : 우국시, 고백적 형식 : 칠언절구 주제 : 일제의 국토 강점에 대한 저항 의지 출전 : '매천집' 참고 : 古詩(古體詩) , 近體詩(근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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