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향가

채운(彩韻) 신다회 2009. 9. 19. 04:59

서동요(薯童謠) 처용가                   제망매가         찬기파랑가(讚耆巴郞歌)

안민가(安民歌) 풍요(風謠)             헌화가(獻花歌)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혜성가(彗星歌) 원왕생가(願往生歌) 도솔가(兜率歌) 원가(怨歌)

천수대비가(千手大悲歌)                 우적가(遇賊歌)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서동요(薯童謠)

                           - 서동(百濟 武王) 


善化公主主隱       善化公主니믄          선화 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 그스지 얼어 두고  남몰래 사랑해 두고

薯童房乙           맛듕바알              맛둥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   바매 몰 안고 가다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서동이와 정을 통하고,
밤에 몰래 나와
서동을 안고는 (궁궐에 돌아) 가다.

연대: 신라 진평왕 때(6세기말)
작자: 서동(백제 무왕)
형태: 향가, 4구체, 동요
주제: 선화공주의 비행을 풍자함
출전: [삼국유사] 권2.
의의: 현전하는 최초의 향가이며 향가중 유일한 동요

민요체의 향가는 형태상 4구체, 8구체, 10구체가 있다.
4구체는 대체로 원시적인 초기의 향가이며, 전래 민요체가
문자로 정착된 것이다.

이 노래는 일종의 참요(讖謠)로 서동의 잠재적 갈망을
선화공주란 상대편에 전가시킨 것이다. 따라서, 주객을 전도
시킨 데 수사적 특징이 있다. 국경을 뛰어 넘고 신분의 귀천을
초월한 낭만적인 한 소년의 사랑이 이 노래에 응집되어 있으며,

그 꿈이 장애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래에서는 어떤 깊은
문학적 배경은 의식하기 어렵다. 다만, 설화의 내용에서처럼
한 영웅의 일대기가 차지하는 에피소드로 이해할 수 있다.

신라 시대 남녀의 연애는 오늘날에 비해 오히려 자유롭고
공개적이었다. 그러나, 귀족의 경우 연애는 자유로왔지만
결혼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이 노래는 "공주의 통정"을
고발조로 노래하여, 듣는 사람들의 주위와 관심을 강하게 끌게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동이 앙숙인 신라의 선화 공주를
연모하여 감자 캐는 아이로 변장하여 신라에 잠입,

이 노래를 아이들에게 퍼뜨려, 부모의 질책을 받고 쫓겨난
공주를 아내로 맞게 되었으며, 그 후 서동은 자라서 백제
무왕이 되었다고 한다.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고대인들의 강한 정열과 순진하고
소박한 노래로서 고대 동요(童謠)의 전형적 형식을 띠고 있다.


* 서동요에 대한 이설(異說)

이 노래에 대한 사연으로 보아 이는 무왕 시대의 것이라는
설(이병도)과 백제가 망할 무렵에 신라 군졸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기 위하여 퍼뜨린 연기설화(緣起說話)라는 설 등이 있다.


무왕(武王, ?~641: 백제 30대 왕. 재위 600-641년)의
이야기와 이 노래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권2. 무왕 항목)


백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남편을 여의고 백제 서울 남쪽 못가에 지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과 결혼하여 장을 낳고,

아명(兒名)을 서동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으나, 어려서는 마(薯)를 캐어 팔아서 생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맛둥(薯童)이라 불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와서 중의 행색을 했다.

마를 가져와 서울(경주) 근방의 동네 아이들에게 주자
여러 아이들이 가까이 따랐다. 이내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부지런히 부르게 하였다. 동요가 장안에 퍼져 궁중까지 알려지니

신하들이 공주의 잘못을 규탄하기에 이르렀고,
왕은 공주를 먼 곳에 귀양보내기에 이르렀다.
공주가 떠나려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서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
하였더니, 공주는 그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공연히 미덥고 즐거웠다. 그래서 따라가다가 상통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는다 하여
함께 백제로 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이것으로 생활을
영위하자 하였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하니

공주는 "황금인데 백 년 동안 부자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서동은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려서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이
진흙처럼 쌓였었다."하였다. 공주가 듣고 깜짝 놀라

"이것은 천하의 보배인데 당신이 금이 있는 곳을 알았으니
이 보배를 우리 부모의 궁전으로 보내는 것이 어떠합니까?"하니
서동이 "좋다." 하고 금을 모았는데 그것이 구름처럼 쌓였다.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가 머무는 곳에 가서 금을 보낼 계책을
물으니 "금만 가져오라"고 하여 공주는 편지를 쓰고 금을
법사에게 가져다 주었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에 신라 궁중으로 옮겨 놓았다.
진평왕이 그 신통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고
항상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고, 서동은 이로 인해서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루는 무왕이 부인과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지명법사에게 나아가 못을 메울 일을
묻자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산을 무너뜨려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회를 법상으로 하여 전, 탑, 낭, 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간판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 했다)
라 하였는데, 진평왕은 많은 공인들을 보내어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이 있다. (삼국사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하고
여기서는 과부의 아들이라 하니 확실치 않다.)

武王(古本作武康.非也.百濟無武康)
第三十,武王名璋.母寡居.築室於京師南池邊.池龍交通而生.

小名薯童.器量難測.常掘薯 .賣爲活業.國人因以爲名.
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美艶無雙.

剃髮來京師.以薯 餉閭里 童. 童親附之.乃作謠.誘群童而唱之云.
善化公主主隱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卯乙抱遣去如.

東謠滿京.達於宮禁.百官極諫.竄流公主於遠方.將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公主將至竄所.薯童出拜途中.將欲侍衛而行.

公主雖不識其從來.偶爾信悅.因此隨行.潛通焉.然後知薯童名.
乃信童謠之驗.同至百濟.出母后所贈金.將謀計活.薯童大笑曰.

此何物也.主曰.此是黃金.可致百年之富.薯童曰.吾自小掘薯之地.
委積如泥土.主聞大驚曰.此是天下至寶.君今知金之所在.

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薯童曰可.於是聚金.積如丘陵.
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問輸金之計.師曰.

吾以神力可輸.將金來矣.主作書,幷金置於師子前.師以神力.
一夜輸置新羅宮中.眞平王異其神變.尊敬尤甚.常馳書問安否.

薯童由此得人心,卽王位.一日.王與夫人.欲幸師子寺.至龍華山下大池邊.
爾勒三尊出現池中.留駕致敬.夫人謂王曰.

須創大伽籃於此地.固所願也.王許之.詣知命所.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乃法像彌勒三,會殿塔廊 

各三所創之.額日彌勒寺.(國事云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至今存其寺

(三國史云是法王之子.而此傳之獨女之子.未詳)


무왕은 신라의 변경을 자주 공략했고,
고구려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와 그 다음의 당에 조공(朝貢)하였으며
만년에는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유흥지로 삼는 등
사치와 유흥을 일삼았다.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은 "말자(末子, 막둥)"였다.
무왕을 "말통대왕(末通大王)"이라고 한 근거도
그의 아명이 "막둥(맛둥)"이었기 때문이다.



처용가
 
                     - 처용(處容)


東京明期月良             서울 밝은 달밤에
夜入伊遊行如可          밤 늦도록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들어 와 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가랑이가 넷이어라

二 隱吾下於叱古         둘은 내 것이고
二 隱誰支下焉古         둘은 뉘 것인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디 내 것이지마는
奪叱乙何如爲理古         앗아간 것을 어찌하리오


'처용가'는 고려 가요에도 동일한 제목의 노래가 있어
향찰로 표기된 어려운 향가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가 되었다.
'처용가'는 국문학에서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노래는 고려가요에서 드러난 요소를 바탕으로 짐작할 때
무가(巫歌)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고려 때에는 궁중의
나례(儺禮)의 의식과 맺어져 '처용희, 처용무'로 발전하였고,

이는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어 제례악으로 쓰였다.
그 배경 설화는 다음과 같다.

신라 제 49대 헌강왕(憲康王) 때, 서울인 경주(慶州)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이어져 있고, 초가라곤 하나도 없었다.

풍악과 노래가 길거리에서 끊이지 않고 비바람은 사철 순조로왔다.
이 때 대왕이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蔚山) 에 놀러갔다가

곧 돌아오려 하면서 물가에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을 정도였다. 이상히 생각하고 좌우에 물으니,

일관(日官)이 "이것은 동해(東海) 용(龍)의 조작이므로
좋은 일을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왕의 분부가 내리자 이내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졌다. 동해의 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덕을 찬양하고 춤을 추며 풍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임금을 따라 서울에 와서
정사(政事)를 보좌하였는데 이름은 처용(處容)이라 하였다.

임금이 미녀로써 아내를 삼게 하여 그를 머물게 하고
또 급간(級干)의 벼슬을 주었다. 그의 아내가 몹시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몰래
동침하였다. 처용이 밖에서 놀다가 집에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처용은 이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니 물러 나갔다. 처용가(處容歌)를 들은 역신은
제 모습은 나타내고 처용 앞에 끓어앉아,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지금 잘못을 범하였는데,
노하지 않으시니 감격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후로는 맹세코 공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후로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경사(慶事)를
맞아 들였다.  왕이 그 후 돌아와 영취산(靈鷲山: 지금의

울산(蔚山)에 있는 산 이름)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 또는 신방사(新房寺)라고 하였으니
용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자신의 아내를 범한 역신을 관대하게 용서하고, 그러한 관대함에
감복하는 역신의 이야기를 현대인의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하여튼 이 노래의 절정은 마지막 7-8행이다.

이것은 체념적인 면으로 보이기도 하나, 오히려 처용의 관대함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해석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축사(逐邪)나
벽사 진경(酸邪進慶)의 노래로 파악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역신이 처용의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밝히고 물러나는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에서는 아무리 악한 신(神)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우리 조상의 여유 있는
예지(叡智)를 발견할 수 있다.

연대 : 신라 헌강왕(875-885)
작자 : 처용
종류 : 8구체 향가
성격 : 축사(逐邪)의 노래, 주술적 무가(巫歌)
주제 : 축신(逐神), 벽사(酸邪)의 노래
의의 : 고려 가요 '처용가'와의 관계로 향가 해독의
       단서가 된 작품,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의식무(儀式舞) 또는 연희(演戱)로 계승됨
출전 : 삼국유사


 
제망매가

                 - 월명사(月明師)


生死路隱                 죽고 사는 길은            
此矣有阿米次儷伊遣        예 있음에 두려워하여  

吾隱去內如辭叱都         나는 간다는 말도   
毛如云遣去內尼叱古        못 다 이르고 갔는가? 

於內秋察早隱風未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一等隱枝良出古            같은 가지에 나고서도  
去奴隱處毛冬乎丁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阿也 彌陀刹良逢乎吾       아아, 미타찰에 만나 볼 나는
道修良待是古如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다.  

 
이 작품은 월명사(月明師)가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노래로 현존하는 향가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배경 설화는 다음과 같다.

월명사가 일찍 죽은 누이를 위하여 재(齋)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월명사가 향가를 부르자

문득 광풍(狂風)이 불어 지전(紙錢-종이로 만든 저승의
여비 돈)을 서쪽으로 날려 없어지게 하였다.

월명사는 항상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살았는데 피리를 잘 불었다.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며 문 앞 큰 길을 지나니 달이 가기를
멈추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곳을 월명리(月明里)라 하였고,
법사도 또한 이름을 떨치었다.

'제망매가'는 10구체 향가의 전형적인 3단 구성으로 되어 있다.
1-4행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망매(亡妹)에 대한 혈육의 정을,
5-8행에서는 삶의 무상감을,

9-10행에서는 불교에 귀의(歸依)를 통한 슬픔의 종교적 심화를
노래하였다. 또한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남을 '한 가지'로,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한 것을 '이른 바람에 떨어진 잎'으로
비유한 것은 매우 돋보이는 표현이다.


연대 : 신라 경덕왕 때
작자 : 월명사
종류 : 10구체 향가
성격 : 추도적, 애상적, 종교적
제재 : 누이의 죽음
주제 : 죽은 누이에 대한 추모와 구도의 결심
의의 : '찬기파랑가'와 함께 서정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
출전 : 삼국유사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 충담사(忠談師)


咽鳴爾處米                  열치매        
露曉邪隱月羅理              나타난 달이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흰 구름 쫓아 떠가는 것 아니냐?   

沙是八陵隱汀理也中          새파란 시냇물에   
矣 史是史藪邪              기랑의 모습이 어리도다      

逸烏川理叱 惡希           이로해서 냇가 조약돌 하나하나에       
郞也持以支如賜烏隱          기파랑께서 지니셨던     

心未際叱 逐內良齊          의젓한 정신의 가닥들을 뒤쫓아 보고 싶구나.        
阿耶 栢史叱枝次高支好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서리도 모르실 화랑이여


'찬기파랑가'는 '안민가'를 지은 충담사의 작품이다.
제목에서 보듯이 흠모하던 기파랑이라는 화랑을 찬양한 노래이다.

이 작품은 '제망매가'와 함께 가장 표현 기교가 뛰어난 향가로
평가 받고 있다. '달, 나리, 조약, 잣가지'는 기파랑의 인품을,
'서리'는 고난, 시련, 역경을 비유한 표현이라 하겠다.

또한 시공간적으로 치밀한 구조 속에 푸른 색과 흰 색의
대조가 주는 청신한 색감으로 기파랑의 뛰어난 인품과 이상을
감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8구체 향가 '모죽지랑가'와는
화랑을 추모한 노래하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연대 : 신라 경덕왕(742-765)
작자 : 충담사
종류 : 10구체 향가
주제 : 기파랑의 높은 인격과 이상을 추모함
의의 : 주술성이나 종교적 색채가 없는 순수한 서정시
     '제망매가'와 함께 서정성이 뛰어난 작품



안민가(安民歌)

                 - 충담사(忠談師)
 

君隱父也                         군(君)은 아비요                      
臣隱愛賜尸母史也                 신(臣)은 사랑하시는 어미요,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민(民)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실진댄   
民是愛尸知古如                  민(民)이 사랑을 알리라.        

窟理叱大 生以支所音物生         대중(大衆)을 살리기에 익숙해져 있기에
此  惡支治良羅                   이를 먹여 다스릴러라.

此地 捨遺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國惡支持以支知古如              할진대 나라 보전(保全)할 것을 알리라.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아아, 군(君)답게 신(臣)답게 민(民)답게
國惡太平恨音叱如                 한다면 나라가 태평을 지속하느니라.            

 
'안민가'는 신라 경덕(景德)왕 때 승려인 충담사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이를 타개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지은 노래라고 한다.
그 배경 설화는 다음과 같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 삼산(五岳三山)의 신(神)들이
때때로 나타나 전정(殿庭)에서 모시었다.

3월 3일에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올라 좌우에게 말하길
"누가 길에서 영복승(榮復僧)을 데려올 수 없겠는가?" 하였다.

이 때에 마침 한 고승이 있어 위의(威儀)가 깨끗하였는데,
배회하며 가고 있었다. 좌우가 바라보다 인도해 와 뵙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말한 영승(榮僧)이 나니다." 하여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있어 납의(衲衣: 승의(僧衣))를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누각 위로 맞아들여 그 통 안을 보니

다구(茶具)가 가득 차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누구인가?"
하니, 승려가 아뢰기를 "충담(忠談)이라 합니다." 하였다.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 "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승이 매해 중삼일(重三日), 중구일(重九日)에 차를 끓여

남산의 삼화령(三花領) 미륵세존께 올리는데, 지금도
이미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과인에게도 역시 한 잔의 차를
나누어 줄 수 있겠는가?" 하니 승려가 차를 끓여 바쳤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찾잔 속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대사가 기파랑을 찬미하여,
사뇌가를 지어 그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런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해 안민가를 지으라." 하였다.
승이 곧바로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치니,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에 봉하였으나,
승이 재배(再拜)하고 받지 않았다.

신라 35대왕인 경덕왕 시절은 신라 문화가 절정기이던 때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변화가 싹튼 시기이기도 하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전제주의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전제주의에 반하는 운동이 진골귀족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때가 경덕왕 때이다. 경덕왕은 이러한 움직임을 막기 위해

관직명을 한문으로 바꾸고, 유교적 정치 이념을 도입하는 등
정치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36대인 혜공왕 때에 대규모
변란으로 신라의 혼란스러운 하대(下代)는 시작한다.

안민가는 정치적인 불안이 시작되던 때에 정치적인 안정을
목적으로 충담사에게 짓게 하여 유포 시킨 노래라 하겠다.

따라서 이 노래는 서정적이기보다는 전달 동기가 강한 교훈성을
띠고 있는 작품이다. 비록 불교가 국교였던 신라이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교적 이념을 노래한 것이다. 현전하는 향가 중에서
그 내용이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표현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며 충간하는 신하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연대 : 신라 경덕왕 때(742-765)
작자 : 충담사
종류 : 10구체 향가
성격 : 유교적. 교훈적. 설득적, 정치적
주제 : 치국 안민(治國安民), 국태 민안(國泰民安)의 도(道)
출전 : 삼국유사

 


풍요(風謠)

                     - 萬姓 男女


來如來如來如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來如哀反多羅       오다 셔럽다라       오다 서럽더라

哀反多矣徒良       셔럽다 의내여       서러운 중생이여
功德修叱如良來如   공덕 닷가라 오다     공덕 닦으러 오다


연대 : 신라 27대 선덕왕 때(7세기)
자자 : 미상(민요)
형태 : 향가 4구체
내용 : 양지가 불상을 만들 때 귀부인들이 진흙을
       운반하면서 부른 불교적인 노래.
주제 : 노동요
출전 : [삼국유사] 권4.양지사석

종교적인 노동요이며 '양지사석가(良志使錫歌)' 또는
'바람결 노래'라고도 한다. 본문에 "공덕" 운운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종교적인 정조를 수반하고 있는
일종의 노동요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신라 선덕 여왕 때 양지라는 중이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조소(造塑)할 때, 만성의 남녀가 진흙을 운반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한다. 따라서 노동요로 보는 것이 통설이나,

이와는 달리 한 줌의 흙이라도 이토(泥土) 시주(施主)가
되겠다는 기원(祈願)이 어린 불교 민요로 보는 이도 있다.


이 노래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삼국유사]권4.양지사석 항목)


석양지 스님의 조상이나 고향은 알 수 없으나, 선덕왕 때의
사람인 것은 사적에 나타나 있다. 스님이 돌지팡이 끝에

베주머니를 걸어 놓으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보시하는
집에 가서 흔들리며 소리를 내었다. 그러면 그 집에서 알고

재비(齋費, 공양미)를 넣는데 부대가 차면 다시 날아
절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가 있는 절을 석장사(錫杖寺)라 했다.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신기하고 이상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는 잡예(雜藝)에도 능통하여 신묘하기 비할 데 없었으며,

문장 또한 능숙하였다. 영묘사의 장육삼존, 천왕상과 전탑을
덮은 기와, 천왕사탑의 팔부신장,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의 금강신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고, 영묘사, 법림사의
현판도 썼다. 또한 일찌기 벽돌을 새겨 조그마한 탑을 만들고

불상 3천여 개를 만들어 그 탑에 봉안하여 절 안에 두고
공경하였다. 그가 영묘사 장육존상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 선정듬)에서 정수(正受, 삼매의 경지)의 태도를
주무르고 문지를 방법을 삼았으므로 성중의 사녀(士女)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 풍요는 이러하다.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민요에 이와 같은 노래가 있어 지금도 시골에서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무엇을 다지거나 하는 일을 할 때에는
모두 이것을 부르고 있는데, 이 노래가 그때에 비롯된 것이다.

이 장육존상을 조성할 때의 경비로 곡식 2만 3천 7백석이 들었다
(혹은 도금할 때 든 비용이라 한다). 평론하여 말하건대, 스님은
재주가 많고 덕이 충만한 대방가(大方家)로서 지엽적 재주에
숨은 자라 하겠다. 찬을 하자면,


공양 뒤면 석장 짚고 뜰에서 노닐고
고요하면 화롯불에 전단향을 피운다

경을 읽고 끝낸 뒤 다른 일 없어
불상을 조성하고 합장하여 우러른다


[삼국유사 권4 의해. 양지사석]


良志使錫

釋良志 未詳祖考鄕邑 唯現迹於善德王朝 錫杖頭掛一布 
錫自飛至檀越家 振拂而鳴 戶知之納齋費  

滿則飛還 故名其所住曰 錫杖寺 其神異莫測皆類此
旁通雜譽 神妙絶比 又善筆札 靈廟丈六三尊 天王像

幷殿塔之瓦 天王寺塔下八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 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書靈廟 法林二寺額 又嘗彫 造一小塔 竝造三千佛

安其塔置於寺中 致敬焉 其塑靈廟之丈六也
自入定 以正受所對 爲 式 故傾城士女爭運泥土

風謠云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至今土人 

相役作皆用之
蓋始于此

像初成之費 入穀二萬三千七百碩 (或云[改]金時租)
議曰

師可謂才全德充
而以大方
隱於末技者也

讚曰
齋罷堂前錫杖閑

靜裝爐鴨自焚檀
殘經讀了無餘事
聊塑圓容合掌看


 
헌화가(獻花歌)
            
                         - 어느 老人

 

紫布岩乎邊希           자줏빛 바위 끝에  
執音乎手母牛放敎遣    잡은 암소를 놓게 하시고

吾 不喩慙 伊賜等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花 折叱可獻乎理音如   꽃을 꺾어 받치오리다.


앞의 서동요와 마찬 가지로 4구체 향가이며, 민요가 문자로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이 노래는 신라의 빼어난
미인으로 알려진 김수로 부인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그 배경 설화는 다음과 같다.

성덕왕 시대에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여 가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옆에 바위가 병풍처럼

바다를 둘러쳐져 있는데, 높이가 천 길이고 위에 철쭉꽃이
만개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보고 말하기를

"누가 저 꽃을 꺾어서 바치겠는가?"라고 하니,
따르던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이 오를 곳이 아닙니다."라고
하며 모두 사양하였다. 그 때, 옆에 소를 몰고 가던

노인(견우노옹-遣牛 老翁)이 부인의 말을 듣고 소를 타고
절벽에 올라가 그 꽃을 꺾고 가사(歌詞)를 지어 바쳤는데,

그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다만 그 노인의 헌화가가 남아 있다.

수로부인(水路夫人) 이야기는 신라인들의 미의식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신라인들은 내면의 아름다움 만큼이나
외형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수로 부인 이야기에는

그녀의 미모에 용왕마저 감탄하여 그녀를 납치하나,
'해가' (고대 가요 구지가 참조)를 지어 부르니
어쩔 수 없이 수로 부인을 돌려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외형적 미의 추구가 있었기에
수로 부인의 미모에 반한 노인이 절벽에 피어 있는
꽃을 꺾어 바치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배경 설화와는 별도로 '헌화가'를
남성이 여성에게 구애하기 위해 부르던 민요가
수로 부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것으로 본다.

꽃을 바치며 노래로 고백하는 운치 있는 사랑이다.

작자 : 어떤 노인
연대 : 신라 33대 성덕왕 때(8세기)
종류 : 4구체 향가
주제 : 순정(純情), 사랑의 고백
출전 : 삼국유사

 


모죽지랑가

                     - 득오(得烏)
 

去隱春皆理米               간 봄 그리워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모든 것이 서러이 시름하는데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아름다움 나타내신 
兒史年數就音墮支行齊       얼굴에 주름살 지려 하옵니다.

目煙廻於尸七史伊衣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逢烏支惡知作乎下是          만나뵙도록 지으리이다.

郞也慕理尸心未行乎尸道尸   낭이여, 그리운 마음에 가는 길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다북쑥 우거진 데서 함께 잘 밤이 있으리.


'모죽지랑가'는 10구체 향가 '찬기파랑가'와 함께 화랑을 그린
대표적인 작품이다.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죽지랑에
대한 사모의 정을 애절하게 잘 드러낸 순수 서정시이다.

또한 이 작품은 다른 향가에 비해 주술적 성격이나 종교적 색채가
적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 배경 설화는 다음과 같다.

신라 32대 효소왕 때 죽지랑이라는 화랑의 무리에
득오 급간(신라의 관등)이 있었다. 그는 화랑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
날마다 출근하다가 한 열흘 보이지 아니하였다.

죽지랑이 득오의 어미를 불러서 아들이 간 곳을 물었다.
그 어미가 대답하기를 "부대장 모량(牟梁) 익선 아간(益宣阿干)이

아들을 부산성 당직으로 가라 하였기 때문에 급히 떠나느라고
당신에게 알리지 못하였노라"고 하였다. 죽지랑이 이르기를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갔으면 필요가 없겠지만,
공사로 갔다니 응당 가서 대접하리라"하고

떡과 술을 가지고 노비를 거느리고 가니 죽지랑의 랑도 137명도
위의를 갖추고 따랐다. 부산성에 이르러서 문지기에게
득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지금 익선의 밭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였다.

낭이 밭으로 찾아가 가지고 간 술과 떡을 먹이며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서 함께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익선이 굳이 거부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 능절(能節)의
조세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수송하다 죽지랑이

선비를 중히 여기는 인품을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융통성 없음을 비루하게 여겨서, 이에 이끌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며 요청했지만, 그래도 허락하지 않으므로

다시 진절(珍節) 사지의 말과 안장까지 주니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가 듣고 사신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럽고 추함을 씻으려고 하였는데,
익선이 도망해 숨어버렸으므로 그의 장자를 잡아갔다.

이때는 중동(仲冬)의 몹시 추운 날이었으므로, 성 안
못 가운데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대로 얼어 죽고 말았다.

대왕이 듣고 명을 내려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에 종사하는 자는
모두 내쫓아 다시는 관공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으며,

검은 옷을 입지 못하게 하고, 만약 중이 된 자는
종고(鐘鼓)가 있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또 명령을 내려 간진의 자손을 평정호손(枰定戶孫)으로 삼아
표창하게 하였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의 고승(高僧)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이었던 까닭에
승직(僧職)을 받지 못하였다.

처음에 술종공(述宗公)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
장차 임지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이때 삼한(三韓)에

전쟁이 있어 기병 3000명을 호송하게 되었다.
가다가 죽지령에 이르렀을 때
한 거사가 그 고갯길을 고르고 있었다. 

공이 보고 감탄하니, 거사 또한 공의 위세가 혁혁함을
좋게 여겨서 서로 마음이 통하게 되었다.

공이 부임한지 한 달이 되었을 때 꿈에 거사가
방가운데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아내도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매우 놀랍고
괴이하게 여겼다. 이튿날 사람을 시켜 그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사람이 말하기를,
"거사는 죽은 지 며칠 되었소."라고 하였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보고하니, 그 죽은 날이
꿈을 꾸던 날과 같았다. 공이 말하기를,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 같다."고 말하며
다시 병졸을 보내어 고갯마루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로 미륵(彌勒) 한 구(軀)를 만들어서 무덤 앞에 세웠다.

아내가 꿈을 꾸던 날부터 임신하여 출산하자 이름을
죽지(竹旨)라고 하였다.

그가 장성하여 벼슬길에 올라 김유신 공의 부수(部帥)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였고, 진덕(眞德), 태종(太宗), 문무(文武),
신문(神文) 등 4대의 총재가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연대 : 신라 효소왕
작자 : 득오(得烏)
종류 : 8구체 향가
성격 : 서정시, 추모시
주제 : 죽지랑에 대한 사모, 연모의 정
출전 : 삼국유사



혜성가(彗星歌)

                       - 융천사


舊理東尸汀叱 乾達婆矣        녜샛물가 건달파에
遊鳥隱城叱良望良古          놀은잣흘란 바라고

倭理叱軍置來叱多             옛군도 왔다
烽燒邪隱邊也 藪耶            봉화 살안가 이슈라

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      삼화에 올암 부샤올 듣고
月置八切爾數於將來尸波衣     달두 바즈리 혀널바에

道尸掃尸星利望良古          길 쓸 별 바라고
彗星也白反也人是有叱多      혜성이여 살반여 사람이 있다

後句 達阿羅浮去伊叱等邪     아으 달 아래 떠갔어라
此也友物叱所音叱彗叱只有叱故 이어우 므슴 헷기 있을고


예전 동해물가 화랑이 논 성 바라보고
왜군이 왔다고 봉화 올린 해변이라

세 활라이 산 구경 오심을 듣고
달도 이미 휘영청 밝혀주고 있는데

길 안내 별을 보고
혜성이여! 사뢴 사람 있어라

아아, 달은 저 아래 떠 갔더라
이보아 무슨 혜성이 있으랴


연대 : 신라 진평왕 때(6세기 말)
작자 : 융천사
형태 : 향가, 10구체
주제 : 축사(逐邪)의 노래
내용 : 노래를 부르니 혜성이 없어지고 왜구마저
       물러갔다는 주술적인 노래.
출전 : [삼국유사] 권5. 융천사 '혜성가'.

신라 진평왕 때 세 화랑이 풍악에 놀러 가려고 할 즈음
갑자기 혜성이 심대성을 범하므로 낭도들이 떠나기를
중지하고자 하자, 작자가 이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그 괴변이 없어졌고, 침노했던 왜구가 물러갔다고 한다.

연기(緣起) 설화  즉, 노래에 마력이 있어서 영험한 기적을
나타낸다는 것은 고대 가요에 으례히 동반하는 특징이다.
향가 '혜성가'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이 노래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권5.융천사 '혜성가'.진평왕대 항목)


다섯째 거렬랑(居烈郞), 여섯째 실처랑(實處郞),
일곱째 보동랑(寶同郞) 등 세 화랑의 무리가 풍악(楓岳, 금강산)에
놀이를 떠나려고 하는데, 마침 혜성이 나타나 대성(大星, 心大星:
북극성)의 중심을 범하는 괴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천체의 괴변은 종종 국토에 불길한 변란을 가져온다고
생각하고 세 화랑은 놀이 떠날 것을 중지하려고 하였다.

이때에 융천사가 향가를 지어 불렀더니 별의 괴변은 사라지고
국토를 침범한 일본 병정도 물러갔다.

이리하여 화가 물러가고 경사가 생기게 되매 대왕이 기뻐하여
화랑들을 풍악(금강산)에 놀러 보냈다.



融天師 彗星歌 眞平王代
第五<居烈郎> 第六<實處郎>(一作<突處郎>)
第七<寶同郎>等三花之徒, 欲遊<楓岳>,

有彗星犯心大星, 郎徒疑之, 欲罷其行. 時,
<天師>作歌歌之, 星怪卽滅, <日本>兵還國, 反成福慶. 大王歡喜,
遣郎遊岳焉. 歌曰:

[舊理東尸汀叱, 乾達婆矣
遊烏隱城叱良望良古,

倭理叱軍置來叱多
烽燒邪隱邊也藪耶,

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
月置八切爾數於將來尸波衣,

道尸掃尸星利望良古,
彗星也白反也人是有叱多,

後句, 達阿羅浮去伊叱等邪,
此也友物比所音叱彗叱只有叱故.]



 

원왕생가(願往生歌)
  
                     - 광덕(廣德)         


月下伊低赤                    달하 이제
西方念丁去賜里遣             서방까정 가시리고

無量壽佛前乃                 무량수불전에
惱叱古音多可支白遣賜立        닛곰다가 살ㅂ고사서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支         다짐 깊으샨 존에 울워러
兩手集刀花乎白良             두손 모도호살바

願往生願往生                 원왕 생 운왕 생
慕人有如白遣賜立             그럴 사람 있다 살ㅂ고사서

阿耶 此身遣也置古            아으 이몸 기쳐두고
四十八大願成遣賜去            사십팔대원 일고살까



달이여 이제
서방(西方) 넘어 가시려는고

무량수불전(無量壽佛前)에
일러서 사뢰옵소서

다짐 깊으신 아미타불을 우러러
두 손을 모두어

왕생(往生)을 원하며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 사뢰소서

아아 이 몸을 남겨 놓고
사십 팔 대원(大願) 이루실까
 

연대 : 신라 30대 문무왕 때(7세기)
작자 : 광덕(또는 광덕의 아내)
형식 : 향가 10구체
주제 : 불교 신앙
내용 : 광덕이 달에 붙여 극락 세계에 가기를 원한 신앙의 노래.
       불교의 내세 사상을 반영하고 있음.


이 노래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 때(661~680)에
불교 신도들이 노래한 찬불가 가운데 하나이다.

이 노래는 특히 아미타불의 48대원(大願) 중 제 18대원인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을 주제로 한 것이다.

신라 문무왕 때 광덕이라는 중이 달을 서방 정토의 사자(使者)로
비유하여 그곳에 귀의(歸依)코자 하는 희원(希願)을 읊은 노래로
미타(彌陀)를 숭상하는 정토(淨土) 사상(思想)을 나타냈다.

이 노래의 작자에 대해서는 광덕이라는 학설과
광덕의 아내라는 주장이 있다.
[삼국유사]의 원문 해석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노래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삼국유사 卷5. 광덕 엄장 항목)

문무왕 때 사문(沙門)에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란
두 사람이 있어서 서로 친하였다. 그들은 평소에 먼저 극락으로
돌아가게 될 때에는 서로 알리자고 약속하였다.

광덕은 분황사 서리(西里)에 은거하여 신을 삼아 업을 삼으며
처자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한편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며 농사를 지었다.

어느 날 해 그림자가 붉은 비ㅌ을 띠고 소나무 그림자는
고요히 저물었을 때 창 밖에서 소리가 나며, "나는 이미 서방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빨리 나를 따라오라"하였다.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구름 밖에 천악(天樂) 소리가 나고
광명이 땅에 뻗쳐 있었다. 다음 날 엄장이 광덕의 집에 가보니
과연 광덕이 죽었다.

이에 광덕의 처와 함께 장례를 마치고 나서 광덕의 아내에게
이르기를 "남편이 죽었으니 함께 삶이 어떠하냐?" 하였다.
그 아내가 허락하여 마침내 함께 살게 되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 남녀의 정을 통하려 하니 그녀가 말하기를
"그대가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가기를 바람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얻으려는 격과 같다" 하였다. 엄장이 놀라 묻기를
"광덕이 이미 동거했거늘 난들 어찌 아니 되겠으랴" 하였다.

그녀가 말하기를 "광덕이 나와 십여 년을 동거하였으되
아직 단 하룻밤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거늘 어찌
더러운 짓을 하리오.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 일념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고, 16관을 지어 이미 달관함이 숙달하여
명월이 창에 비치면 그 빛에 정죄하였오. 그 정성이 이 같았으니
비록 서방 정토에 가지 않는다고 한들 어디로 가리오.

무릇 천리를 가는 자는 그 첫 걸음으로써 규정할 수 있으니,
지금 그대의 신앙은 동으로 간다 할지언정 서로는 갈 수 업다"
하였다.

엄장이 부끄러워 물러가 곧 원효 법사에게로 가서 왕생의 방법을
사십팔대원 일고살까 간절히 구하였다. 원효 대사는 깨달음의

방법으로 쟁관법을 만들어 권유하였다. 엄장이 그제야 몸을 깨끗이
하고 뉘우쳐 일심으로 도를 닦아 또한 극락 정토에 가게 되었다.

광덕의 아내는 원래 분황사의 여종이었으나, 실은 관음보살
십구응신 중 하나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廣德 嚴莊

'文武王'代, 有沙門名 '廣德' '嚴莊' 二人友善. 日夕約曰:
[先歸安養者, 須告之.]

<德>隱居<芬皇>西里(或云, <皇龍寺>有<西去房>, 未知孰是),
蒲鞋爲業, 挾妻子而居;

<莊>庵栖<南岳>, 大種力耕. 一日, 日影拖紅, 松陰靜暮, 窓外有聲, 報云:
[某已四往矣, 惟君好住, 速從我來.]

<莊>排 而出顧之, 雲外有天樂聲, 光明屬地. 明日歸訪其居,
<德>果亡矣. 於是, 乃與其婦收骸, 同營蒿里. 旣事, 乃謂婦曰:

[夫子逝矣, 偕處何如?]
婦曰: [可.]

遂留, 夜將宿欲通焉, 婦 之曰: [師求淨土, 可謂求魚緣木.]
<莊>驚怪問曰: [<德>旣乃爾, 予又何妨?]

婦曰: [夫子與我, 同居十餘載未嘗一夕同床而枕, 況觸汚乎.
但每夜端身正坐, 一聲念阿彌 佛號, 或作十六觀, 觀旣熟,

明月入戶, 時昇其光, 加趺於上. 竭誠若此, 雖欲勿西奚往?
夫適千里者, 一步可規. 今師之觀可云東矣, 西則未可知也.]

<莊>愧 而退, 便詣<元曉法師>處, 懇求津要,
<曉>作《 觀法》誘之, <藏>於是潔己悔責, 一意修觀, 亦得西昇.

《觀》在《曉師本傳》與《海東僧傳》中.
其婦乃<芬皇寺>之婢, 盖十九應身之一德. 嘗有歌云:


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鄕言云報言也)

多可支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支,

兩手集刀花乎白良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阿邪,

此身遺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도솔가(兜率歌)

                           -월명사(月明師)
 

今日此矣散花唱良               오늘 이에 산화(散花)를 불러
巴寶白乎隱花良汝隱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直等隱心音矣命叱使以惡只       곧은 마음의 명(命)에 부리워져
彌勒座主陪立羅良               彌勒座主(미륵 좌주)뫼셔라.



漢詩해석

解曰, 龍樓此日散花歌,           용루에서 오늘 산화가 불러,
桃送靑雲一片花.                 청운에 한 송이 꽃을 뿌려 보내네.

殷中直心之所使,                 은근하고 정중한 곧은 마음이 시키는
遠邀兜率大僊家.                 것이어니, 멀리 도솔대선을 맞으라.

(兜率大僊:도솔천에 계신 미륵보살. 대선은 부처를 뜻함)


오늘 이에 '산화'의 노래 불러
뿌리온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심부름하옵기에
미륵좌주를 모셔라!'


---청운에 한 떨기 꽃 던져 보냈네
은근히 굳은 마음에서 우러나
멀리 도솔천의 큰 선가(仙家)를 맞았네

 
작자 : 월명사
연대 : 신라 경덕왕 19년
갈래 : 향가
형식 : 4구체
성격 : 불교적, 주술적
표현 : 명령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소망 제시
주제 : 미륵 신앙을 통한 국태 민안(國泰民安)

 
월명사가 왕으로부터 "산화공덕케 하라"는 명을 받고
지어 불렀다는 넉 줄로 된 향가다.

당시 유행하던 미륵신앙에 영향을 받았으며, 국가적 의식(儀式)
중에 미륵보살의 하강을 기원한 노래로도 볼 수 있다.

 
'삼국유사' 권 제5 감통感通 제7 월명사 도솔가


경덕왕 19년 경자庚子(760) 4월 초하루에
두 개의 해가 출현하는 변괴가 일어나서
열흘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다. 일관이 아뢰었다.

"인연있는 중을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조원전에 단을 정결히
모으고 임금이 청사루에 거동하여 인연있는 중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가 천맥阡陌(밭두둑) 남쪽 길을 가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서 그를 불러 단을 열고 기도하는 글을 짓게 하니

월명사가 아뢴다. "신승은 다만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겨우 향가만 알 뿐이고 성범聲梵에는 서투릅니다." 왕이 말했다.

"이미 인연이 있는 중으로 뽑혔으니 향가라도 좋소." 이에 월명이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바쳤다.

지금 민간에서는 이것을 산화가라고 하지만 잘못이다.
산화가는 따로 있는데 마땅히 도솔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이내 해의 변괴가 사라졌다.
왕이 이것을 가상히 여겨 품다品茶 -좋은 차- 한 봉과
수정염주 백 팔개를 하사했다. ...(생략)...
 


원가(怨歌)
 
                       - 신충


物叱好支栢史                   뜰의 잣이
秋察好不冬爾屋 墮米           가을에 말라 떨어지지 않으매

汝於多 行齊敎因隱            너 어찌 잊어 잊겠는가 하신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우럴던 낯이 계시온데

月羅理影 古理因淵之叱        달 그림자 옛 못의
行戶浪阿叱沙矣以支如支        가는 물결 원망하듯이

兒史沙叱望阿乃                얼굴사 바라보나
世理都之叱逸鳥隱第也           누리도 싫은지고

(망실□□□□□□□□□)
(망실□□□□□□□□□)


효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신충이라는 사람을 후에 왕위에
오르면 중용하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이를 지키지 않자 신충이

이 노래를 지어 나무에 걸어둠으로써 왕의 약조를 일러 깨우쳤다
한다. 이 노래로 인하여 그 나무가 시들고 다시 소생했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수목 숭배에 입각한 주술적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천수대비가(千手大悲歌)
 
                     - 희명


膝 告召적                무릎을 곧추며
二戶掌音毛乎 內良        두 손바닥 모와

千手觀音叱前良中           천수관음 전에
祈以 白屋戶置內戶多       비옴을 두노이다

千隱手叱千隱目            천 손에 천 눈을
一等下叱放一等 除惡支    하나를 놓고 하나를 더옵기

二于萬隱吾羅               둘 없는 내라
一等沙隱賜以古只內乎叱等邪阿邪也 하나야 그으기 고치올러라

吾良遺知支賜戶等焉        아아, 내게 끼쳐 주시면
放冬矣用屋戶慈悲也根古    놓되 쓰올 자비여 얼마나 큰가



관음보살의 벽화 앞에서 아이에게 노래를 부르고 기도하게 하니
아이가 눈을 떴다는 사연을 가진 이 노래는 관음의 자비와
사뇌가의 신비로움을 아울러 표시한 노래다.

향가는 이처럼 원화소복, 축사, 주술성 등의 성격을 가진
노래이기도 했다는 것이 구지가, 도솔가, 해가를 비롯한 혜성가,
원왕생가, 원가 등을 통해 잘 드러난다.

 
'삼국유사' 권 제3 탑상塔像 제4 분황사천수대비 맹아득안盲兒得眼

경덕왕 때에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여자 희명의 아이가 난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날 그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전 북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 앞에 나가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멀었던 눈이 드디어 떠졌다.



우적가(遇賊歌)
 
                     - 영재(永才)


영재라는 중이 도둑의 요청으로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도둑을 만나서 오히려 도둑을 감화시켰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제 마음에
 형상을 모르려던 날

 멀리 □□ 지나치고
 이제란 숨어서 가고 있네

 오직 그릇된 파계주를
 두려워할 짓에 다시 또 돌아가리

 이 쟁기를 지내곤
 좋은 날이 새리이니

 아아, 오직 요만한 선은
 아니 새 집이 되니이다 

 
'삼국유사' 권 제5  피은避隱 제8 영재우적(永才遇賊)중

 
영재는 성품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향가를 잘했다. 만년에 장차 남악南岳에 은거하려고 대현령大峴嶺에
이르렀을 때 도둑 60여 명을 만났다. 도둑들이 그를 해하려 했으나

영재는 칼날 앞에 임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화기롭게 대하였다. 도둑들이 이상히 여겨 그 이름을 물으니

영재라고 대답했다. 도둑들은 평소에 그 이름을 들었으므로
이에 노래를 짓게 했다.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고려 균여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고려초 균여대사(923-973)가 지은
11수의 십구체 향가다.  균여대사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화엄경의 보현보살 열가지 행원에다 낱낱이 향가 한수씩을 짓고,
11장은 그 결론으로 된 사뇌가이다.

고려 제4대 광종 연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글은
해인사 장경판으로 전하는 '균여전'에 향찰로 기록되어 있다.



1.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以心爲筆盡空王瞻拜唯應遍十方     마음의 붓으로 그린 부처님께 절하는 
                                 이 내 몸 법계의 끝까지 이르러라
一一塵塵諸佛國重重刹刹衆尊堂     티끌마다 부처님의 절이요      .
                                 절마다 모시옵는               .
見聞自覺多生遠 禮敬寧辭浩劫長    법계에 가득찬 부처님          .
                                 구세 다하도록 절하고 싶어라    .
身體語言兼意業 總无疲厭此爲常    아 몸과 말과 뜻에 싫은 생각 없이
                                 이에 부지런히 사무치리.        .


2. 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


遍於佛界懃丹衷一唱南无讚梵雄     오늘 모든 무리가
                                 '나무불'이라 부르는 혀에
辯海庶生三寸抄言泉希涌兩唇中     끝없는 변재의 바다가
                                 한 생각 안에 솟아나누나
稱揚覺帝塵沙化頌詠禪王刹上風     속세의 허망함이 모시는
                                 공덕의 몸을 다하겠기에
縱未談窮一毛德 此心直待盡虛空    끝없는 덕의 바다를
                                 부처로써 기리고지고
                                 아 비록 한 터럭만큼도
                                 부처님의 덕은 사뢸 수 없어라.  .


3. 광수공양가(廣修供養歌)

至誠照明佛前僚願此香籠法界興     부젓가락을 잡고
                                 부처님 앞의 등잔을 고치려 들면
香似妙峯雲樓雲帝油如大海水洪澄    심지는 수미산이요
                                 기름은 큰 바다를 이루는구나
攝生代苦心常切 利物修行力漸增    손은 법계가 다하도록 합장하며
                                 손에손에 불법의 공양거리로
餘供取齊斯法供 直饒千萬摠難勝    법계에 가득 차신 부처님 부처님마다
                                 한결같이 이바지하고 싶으니
                                 아 공양이야 많으나
                                 이것이 가장 좋은 공양이로다.
 

4. 참회업장가(懺悔業障歌)

自從無始劫初中三毒成來罪幾重     넘어져
                                 보리를 향함이 어지러우매
若此惡緣元有相盡諸空界不能容     지은 죄업은
                                 법계나마 나옵니다.
思量業障堪趣紂懃竭丹誠豈墮幇     모진 버릇에 떨어진 삼업은
                                 계행을 지키고서
今願懺除持淨戒 永難塵染似靑松    오늘 무리의 주저없는 참회를
                                 시방세계의 부처님은 아옵소서
                                 아 중생계가 다하고 나의 참회도 다하여
                                 내세에는 길이 악업을 짓지 않으리라.


5. 수희공덕가(隨喜功德歌)

 
聖凡眞妄莫相分同體元來普法門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하나인
                                 연기의 이치를 찾아보고는
生外本無餘佛義我邊寧有別人論     부처와 중생을 다 들어도
                                 어디 내 몸 아닌 남이 있을까
三明積集多功德 六趣修成少善根    닦으시던 도를 내가 지금 닦으니
                                 얻는 사람마다 남이 없네
他造盡皆爲自造 摠堪隨喜摠堪尊    어느 사람의 착함들이야
                                 어찌 아니 기쁠것인가
                                 아 이같이 생각해 감에
                                 질투의 마음 이르지 못하도다.
 

6. 청전법륜가(請轉法輪歌)

 
佛抒成道數難陳我願皆趨正覺因     저 넓은 법계 안의 부처님 회상에
                                 나는 또 나아가서 법의 비를 빌었더라
甘露酒消煩惱熱戒香熏滅罪愆塵     무명의 흙 깊이 묻고
                                 번뇌의 열로 달여냄에 의해
陪隨善友瞻慈室勸請能人轉法輪     착한 싹을 못 기르는
                                 중생의 밭을 적셔주심이여
雨寶遍沾沙界後 更於何處有迷人    아 보리의 열매가 온전한
                                 마음 달이 밝은 가을 밭이여.


7. 청불주제가(請佛住世歌)

極微塵數聖兼賢於此浮生畢化緣     모든 부처님께서
                                 비록 교화의 인연을 마치시었으나
欲示泥洹歸寂滅請經沙劫利人天     손 모아 비비며
                                 세상에 머무시기를 비옵노라
談眞盛會猶堪戀滯俗群迷實可憐     새벽이나 아침과 밤에
                                 함께 갈 벗을 알았노라
若見惠僚將隱沒 境傾丹憩乞淹延    이것을 알고 나니
                                 길 잘못든 무리들이 가엾기 그지없어
                                 아 우리 마음의 물만 맑으면
                                 어찌 부처님 그림자 응하지 않으시리.


8. 상수불학가(常隨佛學歌)

此娑婆界舍那心 不退修來迹可尋    우리 부처님께서
                                 사시던 세상을 닦으려 하시던
皮紙骨毫兼血墨國城宮殿及園林     난행과 고행의 원을
                                 나는 기꺼이 좇으리라
菩提樹下成三點衆會場中演一音     몸은 부서져 티끌이 되어가는 것이니
                                 목숨을 버릴 사이에도
如上妙因摠隨學 永令身出苦河深    그같이 함을 배우리
                                 모든 부처님도 그같이 하신 분이로다
                                 아 불도를 향한 마음아
                                 다른 길로 빗겨 가지 않도록 조심하라.


9. 항순중생가(恒順衆生歌)

樹王偏向野中榮欲利千般萬種生     부처님은
                                 모든 중생을 뿌리로 삼으신 분이라
花果本爲賢聖體幹根元是俗凡精     대비의 물로 적셔주시니
                                 시들지 아니하옵더라
慈波若洽靈根潤覺路宜從行業成     법계에 가득히 굼실굼실 하는
                                 나도 부처님과 함께 살고 함께 죽으니
恒順遍敎群品悅 可知諸佛喜非輕    생각생각 끊임 없이
                                 부처님이 하듯이 중생을 공경하리라
                                 아 중생이 편안하다면
                                 부처님께서도 기뻐하시리로다.


10. 보개회향가(普皆廻向歌)

從初至末所成功廻與含靈一切中     내가 닦은
                                 일체의 선을 돌이켜서
咸蕃得安難苦海摠斯消罪仰眞風     중생의 바다 안에
                                 헤매는 무리들 없도록 알리고 싶어라
同時共出煩塵域異體咸歸法性宮     부처의 바다가 이룩되는 날에는
                                 참회하고 있는 모진 업도
我此至心廻向願 盡於來際不應終    법성의 집 보배라고
                                 예로부터 그렇게 이르셨도다
                                 아 예배드리는 부처님도
                                 내 몸이어니 그 무슨 남이 있을까.


11. 총결무진가(總結無盡歌)

盡衆生界以爲期生界无窮志豈移     중생의 세상이 다하면
                                 내 소원도 다할 날 있으련가
師意要驚俗子夢法歌能代願王詞     중생을 일깨움이
                                 끝없는 내 소원인가
將除妄境須吟誦欲返眞願莫厭疲     이다지 큰 원 세우고 이렇게 나아가니
                                 향하는 대로가 착한 길이로다
相續一心无間斷 大堪隨學普賢慈    보현보살 행원이
                                 또한 부처님의 일이어라
                                 아 보현의 마음을 알게 되니
                                 이로부터 딴 일은 버리고 싶네.

              
'普賢十願歌' 11수는 '화엄경'에 있는 보현십원을 주제로 하여
10장을 읊었고, 마지막장은 화엄경 권 40에 있는 게(偈)의 내용을
주제로 하여 결론을 읊었다.

11수 모두가 불찬(佛讚)을 내용으로 한 서정시이다.
이 普賢十願歌는 뒷날 최행귀에 의해 한시로 번역된 바 있다.
그는 이 노래를 "가사가 맑고 싯구가 고우며 그 뜻이 매우 높다."
고 하였다.





 

출처 : 마음 고인 샘
글쓴이 : 안숙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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